-
-
늦게 도착하는 마음 - 어른이 되어 다시 만드는 삶의 균형
김유영 지음 / 북스고 / 2026년 10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자꾸 느려졌다. 문장 하나를 읽고 멈추고, 다시 읽고, 한참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다. 마음에 드는 문장 몇 개를 골라 필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통필사를 해보고 싶을 만큼 글마다 담긴 의미가 깊게 와닿았다.
살면서 누구나 뒤늦게 이해하게 되는 마음이 있다. 그때는 몰랐던 상대방의 진심도 있고,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자신의 감정도 있다. 어떤 순간에는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그 마음을 이제라도 알아차렸다는 사실만으로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김유영 작가의 열 번째 에세이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놓쳤던 감정들을 하나씩 돌아보게 한다. 외로움과 허전함,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까지 누구나 경험하지만 쉽게 꺼내지 못하는 감정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특히 좋았던 것은 모든 감정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슬픈 마음은 슬픈 대로, 외로운 마음은 외로운 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지 않은 날에도 괜찮은 척해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어른이 되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다. 그런데 살아보니 오히려 관계가 어려워질 때가 많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말을 삼키기도 했고, 내 감정보다 상대방의 상황을 먼저 생각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배려한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속에서 정작 나는 나 자신에게 얼마나 다정했을까.
사람을 좋아하고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도 시간이 지나서야 이해하게 되었다. 마음을 다한다고 모든 관계가 오래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멀어진 관계가 반드시 잘못된 선택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믿었던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타인의 감정까지 모두 책임지려 했던 것은 아닌지, 나에게 필요한 쉼마저 게으름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작가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이탈리아에서 요리를 배우고, 암자에 머물렀던 자신의 경험도 들려준다. 서로 다른 시간을 지나며 얻은 깨달음은 거창한 성공이나 완벽한 삶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흔들리는 순간에도 자신에게 맞는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에 가깝다.
그래서 문장마다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말이 아니라 여러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생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삶의 방향을 바꾸고 나서야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지보다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은지가 중요해졌다.
우리는 자주 남들보다 늦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미 원하는 자리에 도착한 것 같고, 나만 아직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마다 걸어온 길이 다르고 감당해야 했던 무게도 다르다. 같은 시간을 살아도 마음이 성장하는 속도까지 같을 수는 없다.
한때는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며 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의 내가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싶다. 그 시절의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냈기 때문이다.
책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삶이 기울어지는 순간에서 시작해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잠시 멈추고, 다시 걸어가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마음을 단번에 바꾸는 특별한 방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건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읽는 것으로 끝내기 아쉬웠다. 한 문장을 손으로 옮겨 적으며 내가 살아온 시간을 함께 기록해 보고 싶어졌다. 같은 문장이라도 읽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독서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잠시 멈춘다고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멈춰 서서 자신을 살피는 시간이 앞으로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은 사람,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 자신의 선택을 자꾸 의심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특히 문장을 천천히 곱씹으며 읽는 것을 좋아하거나 필사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는 독자라면 더욱 의미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늦게 깨달은 마음들을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좋은 책은 정답을 대신 내려주는 책이 아니라 독자가 자기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내게 그랬다.
한 번 읽고 끝내기보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그때는 지금과 또 다른 문장에서 오래 머물게 될 것 같다. 살아가는 동안 나의 마음도 조금씩 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