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지할게요 (10주년 기념 전면 개정판)
정영욱 지음 / 부크럼 / 2017년 12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다.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펼쳤는데 이상하게도 처음과는 다른 감정이 밀려왔다. 분명 읽었던 문장이고 익숙한 이야기인데 마음에 머무는 부분이 달라졌다. 같은 책을 읽어도 그동안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느냐에 따라 느끼는 감정이 달라진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정영욱 작가의 책은 유독 다시 읽게 된다. 어렵거나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평범한 문장 속에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담겨 있다. 처음 읽을 때는 그저 따뜻하게 느껴졌던 문장이 다시 읽을 때는 오래된 기억을 꺼내 놓기도 한다. 어떤 날에는 위로가 되고, 어떤 날에는 잊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한 번 읽고 덮기보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한다.
이번 10주년 기념 전면 개정판은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편지봉투를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이 책의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시작된 이야기를 실제 편지 한 통처럼 마주하는 기분이다. 봉투를 열면 오래전 받았던 안부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화려한 장식 없이도 책이 전하려는 감정을 충분히 보여주는 표지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사랑했던 사람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과 이별 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리움과 후회, 미안함과 고마움처럼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쯤 경험하는 감정들이다. 누군가를 향해 쓴 편지이지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이야기가 되어 있다. 특별한 사건보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기억을 통해 공감을 끌어낸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평범했던 순간이 관계가 끝난 뒤에는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함께 걷던 길이나 무심코 주고받았던 말, 계절이 바뀔 때마다 떠오르는 작은 습관들이 그렇다. 당시에는 특별하지 않았던 일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소중한 것을 알아보는 데 왜 때로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됐다.
특히 이별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좋았다. 무조건 잊으라고 말하지 않고, 지나간 마음을 억지로 정리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후회가 남으면 그 마음까지 인정하게 한다. 사랑했던 시간이 끝났다고 해서 그때의 진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팠던 관계도 결국 내가 살아온 시간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책 속에서 편지가 향하는 대상은 연인만이 아니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글도 마음에 남았다. 익숙한 목소리와 사소한 생활의 흔적이 누군가에게는 얼마나 간절한 기억이 되는지 생각하게 됐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이 사실은 가장 오래 간직하고 싶은 추억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전하지 못한 말을 마음에 남겨둔다.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할 걸, 그때 먼저 연락할 걸,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말 걸 하는 후회도 생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마음을 돌아보는 일은 지금의 관계를 대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책을 읽고 나니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을 너무 쉽게 미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랑을 잃은 뒤에도 내 삶은 계속된다. 상대를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이나 그 시간을 지나온 나를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다. 관계 속에서 상처받았던 순간을 떠올리면서도 모든 잘못을 나에게 돌릴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됐다.
정영욱 작가의 문장은 감정을 크게 꾸미지 않는다. 담담하게 쓰인 글인데도 어떤 부분에서는 오래 멈추게 된다. 독자에게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각자의 경험을 떠올릴 자리를 남겨두는 문체가 좋다. 다정하면서도 지나치게 가볍지 않고, 슬픔을 다루면서도 끝내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읽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사랑 이야기로도, 이별 이야기로도,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로도 다가올 수 있다.
처음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을 때와 몇 달 뒤 다시 읽었을 때의 감정이 달랐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책의 문장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사이 내가 바라보는 관계와 삶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이다. 재독은 이미 아는 내용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 동안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확인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별 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좋지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서툰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오래된 관계를 돌아보고 싶은 사람이나 짧은 문장으로 조용한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편지를 쓰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반드시 답장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하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을 때 전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건네던 다정한 말을 나 자신에게도 아끼지 않고 싶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감성이 가득하고 따뜻한 책이다. 달라진 내 마음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재독은 더욱 의미 있게 남았다. 좋은 문장은 읽는 순간에만 머무르지 않고 독자의 삶을 따라오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