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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품에 거품 물지 않기
이시은 지음 / 달 / 2026년 6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처음엔 제목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물거품이라는 말과 거품 물지 않기라는 말이 같이 있으니 가볍고 유쾌한 직장인 에세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웃음 뒤에 꽤 오래 일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허무함과 담담함이 있었다.
이 책은 광고 일을 오래 해온 작가의 이야기이지만, 광고업계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열심히 준비한 일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애써 만든 결과물이 내가 바란 모양으로 남지 않고, 그래도 다음 날 다시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책이었다.
직장생활은 늘 결과로만 평가받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너무 많다. 밤늦게까지 고민한 시간, 몇 번이고 다시 고친 문장,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국 해내야 했던 일, 별일 아닌 척 넘겼지만 속으로는 오래 남은 말들.
이 책은 그런 작은 피로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읽으면서 나도 오래 일했던 시간이 떠올랐다. 병원 책임자로 일하던 때,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도 늘 더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근을 해도 머릿속은 계속 일터에 남아 있었고, 마음은 쉽게 쉬지 못했다.
그때는 열심히 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내가 나를 너무 몰아붙이고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지금은 남편과 정비소 일을 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매일 출근하고 있다.
몸은 분명히 더 고될 때가 있다.
덥고 춥고, 손님을 만나고,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예전보다 조금 가볍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일에 거품을 물며 살았는지, 또 얼마나 나를 증명하려 애썼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작가는 일을 너무 진심으로 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
대충하면 덜 아플 텐데 대충하지 못하는 사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결국 또 하는 사람. 공들인 일이 물거품이 되어도 그 안에 쏟은 마음만큼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은 크게 다독이지 않고, 대신 조용히 옆에 앉아주는 느낌이었다.
특히 좋았던 건 작가의 태도였다.
실패하거나 지워진 시간을 무조건 아깝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물거품이 되는 일이 자주 와도 다 잊고 담담하게 다시 해보는 사람의 태도가 있었다. 그게 포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일하기 위해 필요한 마음의 근육처럼 느껴졌다.
책 속에는 직장생활의 피로뿐 아니라 일상에 대한 작은 관찰도 많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함께 일하기 어려운 사람들,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마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기억하는 법 같은 이야기들이 현실적이었다.
회사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삶을 버티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모든 일을 다 기억하고 붙잡고 살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마음의 용량에도 한계가 있고, 평수도 넓지 않다는 말이 특히 와닿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휴지통으로 보내도 된다는 마음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모든 일을 내 안에 쌓아두면 결국 내가 먼저 지치기 때문이다.
월요일에게 조금 늦게 오라고 말하는 장면도 공감됐다.
쉬는 날이 끝나갈 때 찾아오는 아쉬움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이가 있어도, 나이가 들어도, 해야 할 일이 많아도 휴식은 늘 짧고 출근은 늘 빠르다.
그 현실을 투정처럼 말하는 문장이 오히려 솔직해서 좋았다.
이 책은 일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을 미워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일하다가 나 자신까지 물거품으로 만들지는 말자고 말하는 것 같다.
열심히 했던 일이 사라져도 그 시간을 버틴 나는 남아 있고, 닥치면 어떻게든 움직이는 삶 속에서도 내 마음은 지켜야 한다고 말해준다.
읽고 나니 출근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도 결국 나를 조금씩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대단한 성취가 아니어도, 오늘 하루를 해낸 것만으로도 충분한 날들이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유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알려주는 직장인 에세이였다.
일에 너무 진심이라 자주 지치는 사람,
공들인 일이 사라질 때마다 마음까지 무너지는 사람,
오늘도 결국 출근하는 자신을 조금은 다정하게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물거품이 되는 일은 계속 생기겠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까지 거품 물 필요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