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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시간, 영원한 현재 - 김봉렬의 건축 인문학
김봉렬 지음 / 플레져미디어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건축은 늘 현대 건축이다"
건축(architecture)이란 무엇일까?
로마의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을 archy 큰, 본질의 와 tekon 기술, 구축술 의 합성어 architectura 즉 '본질적인 큰 기술'로 정의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까?
문자 기록은 기록자의 편견과 의도가 개입해 왜곡 과장될 가능성이 많지만 건축은 그렇지 않다. 건축은 건축의 흔적, 즉 유적들은 왜곡도 과장도 없이 정직하게 남는다. 건축의 흔적을 따라 그 당시의 정치 문화적인 사회사, 건축적인 사유들, 가문과 개인사까지 상상해보는 흐름을 따라가본다.
이 책은 이 땅에 존재했던 국가들의 시대구분을 따라 고조선,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는 각각 하나만 수록했고, 고려는 남한의 유적 중 전, 중, 후기에 해당하는 사례가 나온다. 조선은 전, 중, 후기로 나누어 여러 사례를 다루었다. 일제강점기, 지금의 대한민국까지 2,500년이라는 시간을 축적한 건축물의 흐름을 따라가 본다.
저자가 이 땅에서 가장 최초의 건축물로 꼽는 것은 고인돌이다.
전 세계에 남아 있는 고인돌 5만여기 가운데 2만 9,500기가 한반도에 현존한다고 한다. 와~~엄청나다. 나 또한 고창 고인돌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그 당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돌들로 무덤을 만들었을까? 를 생각하게 한다. 고창 현지에 가보면 그 엄청난 돌들을 나중에서야 발견하고,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을을 아래쪽으로 박물관 옆으로 다시 조성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많은 돌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마을을 보며 나는 잠시 지금의 30, 40대,혹은 더 나이드신 분들이 어렸을 때 저 돌이 뭔지 모르고 거기서 숨바꼭질을 참 많이 했겠다는 생각을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 시대에는 그렇게 많은 돌들을 힘들게 쌓아 올렸을까?
그 시대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 무덤 양식으로 족장 무덤이라는 것이 정설이지만 한반도는 다르다고 한다. 1인 1기로 조성되어 있어 합장 흔적도 거의 없고, 모든 형식이 공존할 정도로 고유 양식도 없고, 무덤이 아닌 단순한 기념물로 세워진 것들도 있다고 한다.
실험고고학에 따르면 100t의 고인돌을 옮기려면 500 명 정도의 장정 인력을 더해 옮겨야 한다고 한다.
한 가구당 한 명씩 동원한다고 했을 때 2,500 여 명의 부족 공동체가 협업해서 하나의 고인돌을 만든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또 자연 상태인 부정형의 돌 위에 큰 돌운 얹어 견고한 구조를 만들려면 덮개돌의 생김새에 맞춰 받침돌을 깎아 끼워 맞추는 그렝이질 등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한다.
저자는 한반도 고인돌 사회는 죽음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정신 공동체였으며, 평등하고 협업하는 경제 공동체였다고 이야기한다.
고려 시대의 주요 문화유산들이 북한 땅 개성에 밀집돼 있어 우리 남한에는 고려 유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그래서 남한의 몇개 없는 유적들이 귀하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 파주 혜음원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 유적은 1999년에 기와조각을 발견하면서 그 터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이 혜음원지는 고려 국왕이 머무른 왕립 호텔이었다고 한다. 역원과 사찰, 행궁이라는 복합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고려 국왕은 수도인 개성을 '개경', 옛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서경'으로 지금의 서울을 '남경'으로 3곳의 도읍을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일정기간 머무는 순주제를 시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경과 남경 사이의 거리는 아무리 일찍 부지런히 걸어도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고 한다. 당시 혜음령은 남경로의 중요 거점임에도 불구하고 산이 깊고 수풀이 무성해 호랑이가 떼로 몰려 다니고, 도적들이 숨었다가 나타나 사람들을 헤치는 아주 험준한 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행궁을 건립해 민심을 얻으면서 국왕의 남경 순행을 도모하기 위한 정치적인 포석이었다고 한다.
이 혜음원의 터를 건축학적으로 보며 상상해보는데 정말 환상적인 장소였다.
지금까지의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고려의 궁궐과 대형 사찰은 모두 평지가 아닌 경사지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경사지 건축은 평지의 건축과 달리 중심과 대칭 등 기하학적 질서를 구현하기 어렵다고 한다. 게다가 물을 강력한 조경 요소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전성기 혜음원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수십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10 여개의 마당을 중심으로 밀집해 있고, 바닥의 연못과 수로에는 물이 흐로고 여기저기 물보라를 튀기는 작은 폭포 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생각해 보라. 이런 곳에서 하루만 있어도 마음의 평화가 올 거 같지 않은가?
이런 건축물들로 보아도 그 당시의 고려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조선 시대 천한 출신으로 종 3품 고위직에 오른 장영실만을 흔히 알고 있지만 건축계에는 더 대단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박자청으로 지방 하인출신으로 종 1품 공조판서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 사람이 무엇을 만들었는고 하니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한 숱한 왕릉을 조성하고, 종로 일대를 일종의 상가 도시로 조성했고, 창덕궁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경회루가 낡아 기울어질 지경에 이르러 박자청은 크고 화려한 3층 누각을 새로 짓고 누각 둘레에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연못에 물이 고이지 않자 물을 모두 뺀 뒤 누수 부분에 검은 진흙을 발라 물이 고이도록 해 새로운 방수제가지 개발했다고 한다.
그는 도시와 지형을 다루는 식견, 재료와 구조에 대한 전문성, 그리고 뛰어난 창의성과 굳건한 의지까지 진정한 건축가였지만 장영실과 마찬가지로 말로가 좋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사회구조는 탁월한 사람이 그 자리에 맞게 들어가는 것, 흙수저, 금수저가 아닌 그 사람의 능력에 맞게 적재적소에 들어가 능력을 발휘하는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가 되어야만 미래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크 투어리즘을 들어보았는가?
다크투어리즘은 휴양이나 관광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전쟁이나 학살 등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이런 여행도 생소했지만 이 여행의 건축으로 제주 알뜨르비행장에 대해 나온다.
제주도에 관광만 갈줄 알았지 이런 아픔이 있는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말 수세에 몰려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아 군사 비행장을 만들고 훈련장과 포대,대피소, 특공대 기지 등을 섬 전체에 건설했다고 한다. 제주도 오름 줌 160여 개에 지하 진지를 구축할 때 5000 명의 제주도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 흔적들이 아직도 제주도에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커다란 수치감과 절망이 들게 한다.
이 밖에도 고구려 축조 기술을 볼 수 있는 국내성 장군총,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신비로운 가야의 집토기, 지금 아파트 27층 높이의 신라의 황룡사지 9층 석탑, 경술국치 발표가 나자 식구들을 데리고 간도로 건너가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산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청각, 이 땅에 새겨진 임진왜란의 상흔 왜성, 천연두를 피해 가족들을 데리고 씨족 마을을 이룬 영천 매산고택, 효명세자의 왕권 강화의 뜻을 담은 창덕궁 연경당, 1등, 2등,3등 대합실 차별로 나뉜 옛 서울 역사, 일제 강점기 나환자들을 위한 곳 여수 애양원, 불시착한 유에프오같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이 시대 순으로 나온다.
과거의 건축물은 영원한 현재의 연속이다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과거의 건축물은 근본과 현재 사이에서 또 묻고 또 대답한다고...
우리 나라 시대별로 대표적인 건축물들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해보게끔 한다. 그때 당시의 그 사람들은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무엇을 추구했는지, 그때 당시의 건축물들로 그 시절의 개인의 생각과 사회를 상상해보게 한다.
이 책의 과거의 물음들로부터 내가 사는 집에 대해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 묻고 싶어진다.
우리 나라에 존재하고 있는 여러 건축물들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 건축물들이 건네는 이야기들을 더자세히 들어 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고나면 우리나라에 있는 건축물들에 대해 더 애틋하게 사랑을 하게 만든다. 저자의 그 깊이에 푹 빠져 역사의 흐름을 읽어내려 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우리 나라사람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