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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트 -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헤이트
최인철, 홍성수, 김민정, 이은주, 최호근, 이희수, 한건수, 박승찬, 전진성
마로니에북스
인터넷 기사를 보고 댓글을 보다 보면 왜 이렇게 혐오와 비판과 비난과 욕같은 안좋은 말들만 씌여 있을까라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고는 했다.
공감하고 지지하고 서로 연대하는 글들을 쓴다면 참 좋을텐데 그런 댓글들은 찾기 힘들었다.
나는 20대 때 인터넷 챗으로 정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다가 군대 이야기가 나왔었다.
내 기억에 공무원 시험 등에 군대 간 사람에게 특혜를 주는 게 맞는 건가라는 이야기였던 거 같다. 나는 단순하게 물어보며 토론을 하려 했는데 그 말에 남자들은 흥분했다. 아마도 내가 뇌관을 제대로 건드린 것 같았다. 갑자기 돌변한 사람들의 말들 속에 남자들의 분노와 한숨이 들어 있었다. 갑자기 남자 대 여자로 이해하지 못할 싸움에 휘말린듯 했다. 그것은 군대를 안 다녀온 나로서는 어떤 말로도 그네들을 진정지킬 수 없었다. 한때 나도 군대에 가 볼까라는 생각으로 군대에 호기심이 생겼었다. 그런데 그네들의 말들속에서 그 좋은 시절 2년이라는 시간을 저당 잡혀 나라를 위해 강제로 감옥같은 곳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명령에 복종하며 복무해야만 하는 그네들의 억울한 심정이 들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분이 안풀렸는지 나에게 개인톡으로 분노와 입에 담지도 못할 욕들을 장황하게 써 놓았다. 그때는 그게 기분이 굉장히 나빴지만 그만큼 그들은 분노했던 것이다.
혐오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어떠한 것을 증오,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으로, 불쾌, 기피함, 싫어함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비교적 강한 감정(사람이 느끼는 것을 기준으로 함)을 의미하며
원어적으로 '역겹고 구역질 날 정도로 미워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 혐오가 왜 생기는지에 대한 고찰 중 인상깊었던 것이 있었다. 혐오의 근원적 감정은 내집단이 입은, 혹은 입을 수 있는 피해에 대한 방어적 공감이라는 것이다.
즉, 공감이 지나치면 혐오가 된다는 것이다. 나와 너가 다르다고 생각할 때 내가 속한 집단만이 옳고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은 옳지 않다고 강하게 부정하여 혐오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읽으며 혐오라는 감정은 면역과도 같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하여 박멸하고자 노력하는 것. 인간의 몸부터 그렇게 시스템화 되어 있다.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사람을 나누어 이왕이면 내 편에 힘을 실어주려 한다.
혈연, 지연, 학연의 뿌리가 뽑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은주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우리가 혐오댓글에 반대하는 게 중요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침묵의 나선 이론' 이라는 것이 나온다. 그것은 사람은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자기가 마이너리티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그 부분을 공공연하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 또한 부끄러운 경험이 있다.
학교에 다닐 때 좀 머리가 둔한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친구를 어떤 아이들은 괴롭혔다. 그런데 그게 잘못인 줄 알면서도 나는 방관만 했었다. 혹시라도 따돌림 당할까봐 그냥 가만히 있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은주 교수는 지적한다. 사람들이 표현하지 않는 의견은 공론장에서 존재하지 않는 의견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자기 의견이 소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면 그에 동종하는 입장은 실제로 소수 의견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실험도 나온다. 정답은 1번이 확실한데 세 명중 두 명에게 미리 2번이 정답이라고 이야기 하게 하면 나머지 한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라는 유명한 실험인데 그렇게 했을 때 거의 모든 사람이 2번이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실험을 더 했다고 한다. 그 실험은 한 사람만 미리 정답을 말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사람 또한 정답을 말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용기 있는 한 사람만 있어도 이렇게 사람들은 달라질 수 있다. 그 사람 덕분에 남 눈치 보지 않고 자기 의견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주류든 비주류든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어떤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자기의 소신을 밝히는 것도 다시 보면 현명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한 사람의 용기로 나설 때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의견에 동조하는 용기가 생겨 같이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보며 용기를 내는 것이 힘들지라도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나 또한 그때 용기있게 나섰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아마도 나처럼 속으로는 잘못인 줄 알면서도 용기를 못낸 친구들도 함께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친구를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
적극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현하고 혐오 ㆍ 증오발언을 교정하려는 시도를 하는 시민 정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주도 난민 문제 때문에 시끌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난민을 받으면 그 사람들이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가짜 난민들이 섞여 들어와 제주도를 위험하게 만들 것이라며 난민 반대 시위가 있었다.
우리의 씁쓸한 단면이지 않을까 싶다.
이에 대해 이희수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문화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나눌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모든 문화는 자기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향기와 색깔이 있다. 단순히 경제적 척도로만 바라보지 말고 종교, 영성, 인문적 가치 같은 총체적인 기준으로 다른 문화, 다른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열린 마음으로 다른 문화권의 역사를 배우고, 생각하고, 포용하고 화합하는 시선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나라에는 제주도 난민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온 다문화인들이 있다. 일하러 오거나 시집 온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있다.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어떻게 서로 공존할 것인가?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만델라가 만든 진실 화해 위원회의 이야기가 감동으로 다가왔다. 만델라는 수십년을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내가 만델라 였다면 감옥에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만델라는 달랐다.
만델라는 진실 화해 위원회를 만들어 누구든 자기의 잘못을 말하기만 하면 처벌하지 않고 용서해주며 개인적으로 그 집에 가서 일을 해주던지, 돈을 주든지 최대한 자기의 힘으로 피해배상을 하게 했다.
참으로 현명한 결단이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 서로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것을 말만 하면 다 용서를 했다는 것이 참 감동이었다.
여러 국제 분쟁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모두 처음에는 그런 혐오의 감정, 분노의 감정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안좋은 결과만 혹은 비극이 생길 수도 있다. 허나 용서를 하게 되면 평화가 찾아온다.
혐오의 역사에서는 홀로코스트, 터키의 아르마니아 대학살, 르완다 대학살, 십자군 전쟁, 마녀 사냥 등이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아시아인 혐오로 세계 각국에서 폭행과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김치녀, 된장녀, 김여사, 맘충, 한남충 등 혐오 단어들이 계속 생기고 있다.
나도 언제든 소수가 될 수 있다.
나도 언제든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혐오의 대상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혐오라는 감정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것인가?
혐오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책이라 읽어보길 강력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무상 제공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