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늘의 뿌리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평점 :
...한 친구가 독방에서 며칠을 보내고 나서 떠올린 생각인데...
그 친구는 감방벽 때문에 질식할 것처럼 느껴지면, 자유로운 코끼리 떼를 상상하기 시작했다죠.
그 후 우리는 감방에서 더 견디지 못할 상태가 되면,
아프리카의 확 트인 공간을 돌진하는 이 거대한 동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그러자면 엄청난 상상력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그 노력이 우리를 살아있게 해주었어요.
홀로 남아 기진맥친한 채 우리는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었으며,
눈을 감은채 지나는 길마다 모든걸 쓸어버리는, 그 무엇도 멈춰 세울수 없는 우리의 코끼리를 보았죠.
그 경이로운 자유의 발길 아래로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같았고,
시원한 바람이 우리의 폐를 채우는것 같았어요...
..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달리는 자유로운 코끼리 떼들-
벽도, 철조망도, 아무것도 거칠게 없는 수백의 수백마리의 경이로운 짐승들,
툭 터진 공간을 가로질러 달려들어 지나가는 길에 모든 것을 뭉개버리고,
모든걸 뒤엎어버리는 수백의, 수백마리의 코리끼를 생각해봐.
살아있는한 그 무엇으로도 그들을 멈추게 할수는 없지.
바로 자유란 말이야..
..이슬람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뿌리'라고 부르오. 멕시코 인디언들에게는 이것이 '생의 나무'로,
모두들 그 앞에 무릎을 꿇고는 눈을 들어 아프도록 가슴을 두드린다오.
모렐같은 고집쟁이들이...밖으로 드러내려 애쓰는 어떤 보호 욕구 말이오.
그들은 가슴 속에 깊이 묻힌 이 하늘의 뿌리들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절망해선 안되지. 오히려 미쳐야돼.
땅위에서 살려고 폐도없이 물밖으로 배를 내놓고, 어떡해서라도 숨을 쉬려고 애썼던
첫번째 파충류도 미쳤던거지. 어쨌건 그래서 인간이 생겨나게 되었잖아.
항상 할수있는한 최선을 다하는 거야...
-로맹가리.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 中...
-----------------------------------------------------------------------------------
토할 정도로 두꺼운 책.
시간당 100페이지 넘게도 읽어치우는 속독쟁이건만,
이 책은...서너장에 한번씩 숨이 턱 막혀서 잠시 멍해지는-
뭐랄까, 이렇게 가만히 좌시 하는것조차도 자연에 대한 모독인듯양-
웬지 주인공 모렐이 총구로 내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는듯한 불편함을 외면할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여러 논쟁들이란 때론 너무도 소모적이라서-
감정, 이해관계, 혹은 정치적 이용과 맞물려-이를테면 소고기 수입과 촛불집회같은-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최초 궁극의 원칙과 멀어지는게 아이러니해서-
결론도 없는 지리멸렬한 싸움들에 질려서, 나는 정치고 종교고 나발이고 관심이 없다.
때문에 환경파괴라고 해서 특별히 관심있을리 만무했다.
'하늘의 뿌리'를 통해 그런 나의 무관심함에 좀 죄책감이 느껴졌는데,
단지 주제가 '멸종동물보호'에 한정됐다면, 매력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은 수많은 인물의 캐릭터들을 통해 인간성의 본질을 꼬집는다.
인간성에 대한 절망적과 그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놓치않는 그것-
그것은 자연...인간에 대한 더 큰 연민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나치 포로 수용소에서 자유를 떠올리기 위해 상상했던 코끼리.
석방되자 코끼리 사수를 위해 아프리카로 뛰어든 모렐.
그가 지켜야 할것은 코끼리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그리고 인간 자신.
정치적 이념과 정체성의 혼란이 뒤섞인...마지막까지 버릴수 없는 무엇.
최초로 상상의 코끼리를 고안했던 수용소의 그 동료가-
나중에 코끼리 살육업자가 되어 재회한 장면에선 정말 소름 돋는듯했다.
이 서글픈 배신에 경악하기보다 오히려 통곡하고픈 심정은 왜였을까.
난 자유의 표상을 기껏 '비상(飛上)'을 떠올렸는데, 코끼리에 비하면 참 1차원적인 발상이였다.
무엇으로부터 지키려는 자유는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지키지않고선 벗어날수 없는것이니.
또한 아프리카에 대한, 내가 기존에 갖고있던 이미지가 얼마나 부끄러운 수준인지-
그 속의 백인과 흑인, 그리고 뼈속까지 백인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흑인,
태초의 모습대로 지키는 것,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후의 휴우증, 비 아프리카인의 이중성,
자본주의와 무분별한 개발, 단백질 섭취를 위한 사냥, 멸종동물보호와 자연보호..
그 복잡성에 대해 한번도 제대로 고찰할 기회가 없었다는걸 이제야 알았다.
코끼리에 대해선 무서울만큼 맹목적인 모렐의 존경스러운 점은,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분노와 같은 감정을 무기로 삼지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상아와 가죽을 벗기는 공장을 파괴할뿐 업자들을 처단하진 않는다-
그래서 적이었던 자조차도 아군이 되어버리는, 종국에는 모두와의 화해를 꿈꾸는-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갑옷처럼 껴입고 있는건지..
정작으로 싸워야할 것은 무엇이였는지...싸운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이유도 구차한 것들만
억지로 부여잡고 있지는 않았는지..반성하게 하는 부분이였다.
하늘의 뿌리.
불어 원제목의 직역인듯하나, 어쩐지 입에 쉽게 담으면 안될 단어로 느껴진다.
솔직히 권하고 싶진않다. 어려운것 투성이라.
분명히 간단한 문장인데- 선뜻 스며들지않는 것들이 만만치않다.
하지만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선 가장 가치있는 책은 틀림없는듯.
나중에 아프리카에 가게 된다면, 꼭 다시 읽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