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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레미 말랭그레 그림, 드니 로베르 외 인터뷰 정리 / 시대의창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때‘풀브라이트(full-bright) 장학생’출신 교수가 있었다. 미국에서 언어학 박사를 받고 모교인 우리학교에서 교수가 됐다. 서울 명문대 수재들도 뚫기 어려운 풀브라이트를 패스했단 사실만으로도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가 많은 얘기를 해주길 기대했다. 미국 대학이나 문화 뭐든지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수업 시간에 꿈, 정치 혹은 미국에 관해 한번도 논하지 않았다. 무용담처럼 한번쯤 늘어놓을 법도 한데, 주관적인 논평이라곤 몰랐다. 심지어 그는 386세대 였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그가 수업시간에 삼천포로 빠질 줄도 모르는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도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삶의 지침을 꼬집어줘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말하자면 그는 후배들에겐 F학점짜리 선배였던 것이다.
영문학을 전공하면 한번쯤 '놈 촘스키'에 대해 듣게 된다. 나도 그 풀브라이트 교수에게서 처음 그 이름을 들었다. 그는 미국에서 촘스키의 수업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참고로 언어학은 80년대에 촘스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생 학문이다. 그런 언어학을 그가 90년대 미국에서 전공했다는 건, 우리나라에선 거의 최전선에서 언어학을 섭렵했음을 뜻한다. 아무리 풀브라이트 출신이라도, 국내에선 지방사립대 출신이라 꿈이 좌절된 걸까. 그는 수업경험 외에는 촘스키에 대해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때 언어학 입문을 듣던 나도, 그저 촘스키가 상아탑에 갇혀 꼬장꼬장하게 언어학을 만들어 낸 그런 학자인줄로만 알았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세상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통찰- 촘스키와의 대화’
부끄럽게도 촘스키 책은 인터넷 서점 이벤트 때문에 주문한 책이었다. 이름도 익히 들었고, 꽤 저렴한 가격도 선택에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버린 내 심정은 꽤 착잡했다. 얼마 전 읽은‘88만원 세대’가 우리나라 현 세대를 경제학의 미시적 관점으로 분석했다면, 이 책은 세계의 정치학의 거시적 관점으로 분석해 놓았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프랑스인 기자 드니 로베르와 베로니카 자라쇼비치가 이탈리아에서 촘스키와 현 국제정세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단순한 인터뷰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여기에 촘스키의 사상의 오롯이 집약돼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99년에 대화한 것을 기초로 2000년에 발간됐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현 국제 정세를 논하는데도 전혀 무리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무지몽매함이 부끄러웠다. 촘스키의 언어학자라는 명함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언어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이자 정치 평론가였다. 정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깊은 통찰력과 열정적인 진실에의 목소리였다.
이 책의 논점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표현의 자유와 지식인의 역할’과 ‘기업 권력과 가짜 민주주의 정부의 대표 미국’이다.
그리고 지상에 남은 마지막 예언처럼 우리에게 말한다.“깨어있으라”고.
왜곡된 선전에 세뇌당하지 않을 최상의 방책은 지적인 자기 방어법, 그것뿐이라고.
촘스키는 먼저 ‘포리송 사건’에 대해 해명한다. 포리송은‘히틀러의 가스실은 허구다’는 놀라운 주장으로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인물이다. 그는 곧 사회에서 매장됐으며, 그의 서적 출간 역시 금지됐다. 이 사건에서 촘스키는 표현의 자유억압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촘스키를 포리송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매도해 버렸다. 단지 그는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이는 에밀졸라가 대변한 '드레퓌스 사건'의 참 묘한 데자부다. 촘스키의 표현의 자유 주장과 포리송의 편들기를 과연 대중들이 구별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언론이 마녀 사냥을 한 것이었다. 적색 경보를 울리는 촘스키의 주장에 언론 권력이 나치주의의 이름으로 대중을 위협한 것이다. 왜? 자유가 확대될수록 대중은 통제하기 어려우니까.
그러고 보면 현대인은 미디어의 사생아들이다. 언론의 자유는 곧 표현의 자유와 동의어지만, 우리에겐 둘 다 온전히 주어져있지 않다. 그것은 거대 미디어의 소유일 뿐이다. 세상에 말해선 안 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아니, 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나도 회사 게시판에 글을 몇 번 올렸다가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그건 ‘자유'게시판이 아니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감시되고 검열되는 게시판이었다. 대중은 거대 미디어 권력에 의해 ‘프로그램’된 언론을 의식속에 입력해야 한다. 대중에겐 선택권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서 다국적 기업 혹은 강대국에 의한 대학살이 일어나도, CNN이나 BBC이 입 다물면 그만이다. 미국은 소말리아 내전에서 독재자를 지원했고 그 결과 수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과연 이것이 미국도 언론의 책임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라크 전쟁은?!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이른 흐름을 꿰뚫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채 대중을 종속시키려는 이런 음모에 가답합니다.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피에르 부르디외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택시기사로 삶을 끝마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교육제도가 선별 작업을 합니다. 교육제도가 순종과 복종을 조장합니다. 이런 제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제됩니다...
표현의 자유를 통해 그는 지식인의 책무를 거듭 역설한다.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세상에 알려야 하며, 정부의 명분과 동기 이면에 감추어진 의도를 파악하고 비판해야 한다.” 미국 최고의 살아있는 양심이자 지식인인 촘스키의 주장은 강력하다 못해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의 목소리가 어째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느낌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미국 최고의 지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깊이 깨우칠 것을 대중에게 촉구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 예전의 교수님이 생각났다. 그는 왜 그렇게 입을 다문걸까. 풀브라이트를 패스할 정도면 남달리 피력 할 수 있는 견해가 많았을텐데. 인생의 선배로써 스승으로써 왜 학교와 미국의 부조리에 대해 한 마디도 우리에게 해주지 못한걸까. 그도 그게 ‘밥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미국이 키워준 풀 브라이트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걸까.
그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적어도 순수한 시장경제의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용과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거대한 공공 분야와, 전체주의적 성격을 딴 거대한 민간 분야가 양분하고 있는 경제 현실에 우리는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오늘날 미국 경제체제를 “엄청난 권력을 지닌 개인 기업들이 서로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존하면서 위험과 비용을 분산시키는 체제”라는 것이다. 정말 소름끼치도록 적확한 분석이 아닐수 없다. 88만원 세대의 '승자독식'게임이 어디서 왔나 싶었더니 바로 미국의 경제 그 자체였다니. 눈을 뜨고도 당한 기분은 왜일까. 우리에게 미국이외의 대안은 없는걸까. '자기 리스트의 부재'는 비단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회가 민주화될 때, 달리 말해서 국민을 강제로 통제하고 소외시키기 힘들 때 엘리트 집단이 선전이란 방법을 동원합니다.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전 등을 운영하는 거대기업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로 대중은 서로 소외되어 갈 뿐입니다.“ 혹자는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하며 언론의 공공성에 대해 운운하지만 촘스키는 언론이란 공공시장을 지배하는 기업의 월급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그랬다. 가만히 TV의 공익광고를 보면 뭔가 이상하다. '미래의 더 나은 코리아는 너희들의 것'이란 광고는 공익광고면서도 대기업이, '한국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란 광고 또한 대기업이 자회사를 국가 이미지로 광고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이미 '통제'하고 있는게 아닌가. 대기업은 대중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보장하는것 처럼 포장해놓고, 더 많은 착취와 더 무책임한 일들을 벌여놓지 않았던가. 그럴수록 대기업은 이미지즘 광고를 놓지않고 있다. 맹목적인 욕구만 추구할것을 부채질할뿐.
그렇다면 기업과 미국. 거대 언론을 대상으로 대중은 우매한 채로 살아야 하는가? 촘스키, 당신도 이렇게 혼자 미국을 향해 싸우는데 우리라고 별수 있겠어요? 라고 반박한다면 촘스키는 뭐라 대답할까. 때문에 그는 민중이 항시 깨어있어야 하며 민중이 조직화된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힘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민중이 조직화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습니다. 산이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저자는 “촘스키의 중요한 교훈의 하나는 기존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말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절대 믿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것도 확실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믿지 말라는 것이다. 확인하고 심사숙고하라는 것이다. 각자의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기지(旣知)의 사실에서 해방되라는 것이다.”고 덧붙인다. 기지의 사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재차 의구심을 품어보도록 하는 것. 저자는 이것이 바로 그가 촘스키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얻은 교훈이라고 말하고 있다.
체념한채 기성사회에 빌붙어 살것인가, 아니면 깨우친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일 것인가. 국제사회와 경제 구조에 관해 이 많은 통찰을 다 깨우치기도 힘들지만, 그 깨우침대로 '행동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실로 밥줄이란 생존을 위협하는 무서운 것이니까. 나 역시 예전에 노조에서 러브콜을 받았을때 선뜻 수락할 수 없었다. 입사 초기라서 뭘 잘 모른단 이유도 있었지만, 솔직히 내가 아는 만큼, 글을 쓰는 만큼 행동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변명같지만. 깨어있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려면 얼마나 더 많은 용기와 열정이 필요한 걸까.
분명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정부도 기업도 언론도 아닌 대중으로부터 시작되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 언젠가는 시작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내는데 급급해 나침반조차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건 아닌지. 어쩌면 '변해야산다'는 개념조차 없는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지금의 우리에겐 촘스키와 같은 지식인이 절실히 필요하다. 권력에 아부하는 거짓 지식인이 아니라 대중에게 진정으로 갈길을 제시해줄 그런 현자 말이다. 문득 그 옛날의 풀브라이트 교수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비록 나의 '언어학 입문' 학점은 엉망이었지만, 인간적으로 술 한잔 기울이며 인생의 선배로써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줄 순 없는지 다시한번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