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동형 기자들 - 객관보도의 적, 피동형과 익명 표현을 고발한다
김지영 지음 / 효형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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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내년에는 국세 세입예산이 사상 처음으로 200조원을 돌파, 205조9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됐다. 27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1년 국세수입 전망 및 2012년 국세 세입예산'에 따르면, 올해 국세 수입은 당초 예산안 187조6000억원보다 5조2000억원 증가한 192조8000억원으로 전망됐다."

27일자 <조세일보>에 실린 '올해 국세 5.2조원 더 걷힐 듯...192.8조 예상' 기사는 곳곳에서 피동형을 사용하고 있다. 이 기사뿐만 아니다. 신문 기사에서 판단된다, 보여진다, 분석된다 등의 피동형 표현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수많은 글쓰기 교본이 우리말 문장은 능동문으로 쓰는 것이 원칙이라고 가르치지만, 언론은 능동문으로 쓸 수 있는 문장도 피동문으로 쓰고 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풀이되어진다, 추정되어진다, 관측되어진다 등의 이중피동을 쓰기도 한다. <피동형 기자들>은 이처럼 피동형을 남발하는 '피동형 기자들'에게 내미는 엄중한 고발장이다.     

주어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

우리 언론이 피동형 표현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피동형 기자들>이 돋보이는 것은 이 문제를 피동형을 사용하는 기자들의 심리와 연결하고 나아가 저널리즘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위의 기사를 보자. 본디 예상과 전망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런데 '예상됐다'와 '전망됐다'는 피동형을 사용하니 누가 예상하고, 전망하고 있는 것인지 불확실해졌다. 이처럼 '피동형 문장에서는 행동 주체가 잠복한다' 그래서 피동형 문장은 무책임한 문체다. 예상과 전망의 주체는 기자가 아닌 정체불명의 제3자가 되고, 자연스레 책임도 제3자가 진다. 영문법에서도 수동태(우리의 '피동형')를 쓸 때는 다음과 같은 사유가 있다고 한다.

① 행위의 주체를 밝히고 싶지 않거나 불분명할 때
② 행위의 책임을 언급하고 싶지 않을 때
③ 행위의 주체보다는 객체를 강조하고 싶을 때
④ 행위가 완료됐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

우리 언론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피동형은 대개 ①과 ②에 해당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문득 한나라당 서울시장 유력후보이며, 자위대 발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나경원 최고위원이 떠오른다. 이명박 대통령(당시 대통령 후보)이 광운대 특강에서 "BBK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고 말한 동영상이 등장했을 때, 나경원 최고위원(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은 주어가 없으므로 이명박 대통령이 BBK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 '주어경원'이란 별명을 얻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어가 없으면 책임도 없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교훈은 양상은 좀 다르지만, 피동형 문장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기자들은 피동형의 '주어 없음'에 기대 마음껏 예상하고, 전망하고, 판단한다. 피동형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섣부른 예단과 근거 없는 추측을 기정사실화한다. 

주어를 숨기고 정체불명의 제3자를 끌어오니 얼핏 보면 객관보도 같지만, 사실은 기자의 의견과 주관으로 가득한 기사다. 피동형 문장은 사실과 의견의 구분이라는 저널리즘의 기본적인 원칙을 뒤흔들고 있다. 그래서 피동형 문장을 바로 잡는 일은 단순히 우리 말글을 바로잡는 일이 아니다. 우리 저널리즘을 바로잡는 일이다.     

5공의 유산, 피동형 문장

저자는 무책임한 피동형 문장의 남발을 80년대 초 군부독재와 연결해 설명한다. 5공화국은 정권 유지를 위해 언론통제에 힘썼다.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대량 해고했고, 행정부가 자의적으로 언론사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된 언론규제법을 제정했다. 보도지침을 통해 어떤 사안을 보도해야 할지, 어느 정도의 비중과 어떤 논조로 보도해야 할지를 지시했고, 언론사들은 보도 지침을 충실히 따랐다. 

1988년 국회 언론청문회 당시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의 진술에 따르면, 제5공화국 기간 중 홍보조정실의 보도 지침은 평균 70퍼센트가량 반영됐다. 또 유재천 당시 서강대 신문학과 교수의 분석으로는 친여 성향 신문은 '보도 불가' 지침 중 96퍼센트를, '보도 요망' 지침은 100퍼센트 지면 제작에 반영했다. - <피동형 기자들> 25p.

이런 상황에서 기자들은 소신대로 기사를 쓸 수 없었다. 군부독재 정권을 정당화하는 기사를 써야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그래서 피동형 문장 뒤에 숨었다. "내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더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다. 잠깐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나온 신문 사설을 보자.

1980827, 전두환 제11대 대통령 당선 직후 신문 사설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역사적 출범

어떤 의미에서든 전두환 대통령의 영도 아래 전개될 새 시대, 새 역사는 우리의 5천년 민족사에 금자탑적 분수령으로 가름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고 보아진다.

<경향신문> 8272면 사설 중

 

새 시대의 출범

새 시대를 이끌 정치 엘리트 집단은 517 조치 이후 급격히 부상한 군부 엘리트를 포함하여 국가발전에 공헌해온 지역사회 일꾼, 관료 엘리트 그리고 아직 그 능력이 시험되지는 않았으나 참신하고 양심적인 자세를 갖춘 신진인사들이 주력을 이룰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서울신문> 8272면 사설 중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개막

이러한 목표는 전 대통령뿐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모든 국민이 합심하여 이룩하도록 노력해야 될 일이겠으나 이와 아울러 당장 국가안보태세를 공고히 하고 우방과의 우호협력관계를 두터이 하여 북괴의 침략야욕을 사전에 억제하고 안으로는 조속히 국내질서를 확립하여 모든 것을 정상화하는 노력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동아일보> 8282면 사설 중

 

새 시대의 개막

전 대통령의 정치적 비전은 이미 국보위가 단행한 사회개혁을 통하여 널리 인식되고 있다.

<조선일보> 8282면 사설 중


4개 신문 모두 전두환과 5공화국을 정당화하는 대목에서 본다, 추측한다, 기대한다, 인식한다고 적어야 할 문장을 피동형으로 처리했다. 여기서 5공화국과 피동형 문장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차마 내놓고 군부독재 정권을 찬양할 수 없어 피동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피동형 문장은 기자로서 양심의 발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5공화국이 물러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지금, 기자들이 더 많은 피동형을 남용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오늘날 우리 언론의 피동형 사용 빈도는 피동형(수동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국이나 일본의 일간지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사실의 무미건조한 나열이어야 할 스트레이트 기사에서도 피동형 문장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바야흐로 '피동형 기자들'의 시대다.

피동형 남용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저자가 <경향> <동아> <조선> <중앙> <한겨레>를 대상으로 피동형 남용 실태를 조사한 결과 1개 면당 평균 피동형 수가 가장 많은 곳이 <한겨레>였다. 그다음은 <경향> <조선> <중앙> <동아> 순이었다. 2009년 3월 23일 자 신문만을 비교했기에 한국 일간지의 피동형 남용 실태를 제대로 조사했다고 말하기는 부족하지만, 실증조사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능동과 피동, 세계관의 차이

좋은 책은 우리의 시야를 넓힌다. 이전에는 범상하게 스쳐 지나가던 것이 새로운 의미와 느낌으로 다가온다. <피동형 기자들>은 내 시야를 넓혔다. 신문 기사를 읽다가도 '전망된다', '판단된다'를 발견하면 눈에 거슬리고, 이 글을 쓰면서도 불필요하거나 문법적으로 틀린 피동형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거듭 확인했다. 저널리즘에 대한 시야를 넓혀준다는 점에서 언론인 지망생이 아니라도 저널리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피동형 기자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한 가지 흠을 잡자면 결론에서 피동형의 문제를 우리말 바로쓰기의 차원으로 축소하는 것 같아 아쉽다. 우리말 바로쓰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언론은 대중의 언어생활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에 언론의 잘못된 언어 사용은 심각한 문제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피동형의 문제는 동시에 저널리즘의 문제고, 저널리즘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문제다. 피동형 문장은 주관과 의견으로 채색된 창을 객관과 사실의 투명한 창으로 포장해 현실 세계를 호도한다. 능동과 피동의 차이는 대중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주체가 먼저 나오느냐 아니면 객체가 먼저 나오느냐에 따라 사건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자동사를 쓰느냐 타동사를 쓰느냐에 따라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 파울러 Roger Fowler

그래서 능동과 피동의 문제는 바른말 고운 말 쓰기의 차원을 넘어선다. 언론이 현실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전달하는지, 우리 저널리즘이 올바로 서 있는지를 진단하는 하나의 척도다. 그렇다면 피동형 문장과 '피동형 기자들'로 가득한 우리 저널리즘이 서 있는 위치는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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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메이토와 포테이토 - 강병철 성장소설 작은숲 그루터기 1
강병철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작은숲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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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靑春)은 푸른(靑) 봄(春)이라는 뜻이다. 봄은 겨우내 잠들어 있던 만물이 따사로운 햇볕 아래 깨어나 생명력을 뽐내는 계절. 10대에서 20대에 이르는 젊은 시절을 청춘이라 부르는 것은 그 시기가 봄처럼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 생명력이 약동하는 순간이라는 뜻이리라.

 

청춘이 늘 푸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초조할 때도 있고, 어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좋아하는 이성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해 속만 태우고, 믿었던 친구와 다투기도 한다. 그렇게 나름의 고민과 상처를 경험하며 어른이 된다. 그러나 괴롭고 힘들었던 기억들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그것이 청춘이 갖는 힘이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는 주인공 강철의 어린 시절을 통해 조금은 어리고 어설펐던 학창시절, 그래서 더욱 그립고 아련한 청춘의 추억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청춘의 기억


소설은 강철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오면서 시작한다. 서울 생활은 녹록하지 않다. 키 큰 아이들은 키 작은 아이들을 얕보고 괴롭히기 일쑤고, 서울 선생님의 매타작은 시골 선생님보다 심하다. 시골에서는 반 1등이었지만, 서울에 오니 10등 안팎으로 밀려난다. 공부, 싸움, 키까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기에 '나만의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글쓰기에 매달려 본다. 고달픈 생활이지만 좋은 벗과 고민을 나누며 견딘다. 이성에 눈을 뜨며 누나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가 그리는 청춘의 여러 장면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체벌이다. 1960~1970년대에 학교를 다닌 기성세대라면, 이 대목에서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 만하다. 선생님들은 '곡괭이 찍기', '고양이 발목치기', '자동빵 시스템' 등 다양한 체벌을 구사하는데, 그중에서도 최악은 친구끼리 증오하게 하는 '마주 보고 때리기'다.

 

수학교사 합죽님은 때리는 대신 아랫도리를 더듬어 굴욕감을 주기도 한다. 2011년의 학교 현장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기에 기성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청소년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체벌과 학생인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무거운 소설은 아니다. 강철과 그의 친구들은 평범한 10대 학생일 뿐이다. "나는 신사입니다"를 네 글자로 줄이면 "신사임당"이라는 시답잖은 말장난을 하고, '나무늘보로 변신'해 여자 목욕탕을 훔쳐보기도 한다. 강철이 여자 목욕탕을 훔쳐보려다 떨어져 다치는 장면은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토메이토와 포테이토>는 기존의 성장소설이 그러하듯 평범한 청춘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게 만든다.

 

사회적 금지에 대한 도전


<토메이토와 포테이토>가 다른 성장소설과 구별되는 점은 개인의 추억을 회고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 모순에 대한 저항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은 3선개헌 반대 시위를 그린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해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을 넘어 서울 시내 고등학교까지 번진다.

 

강철의 고등학교 선배들도 3선개헌 반대 시위에 동참하는데 교사들은 시위를 막으려 한다. 그러나 단상에 선 학생은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총을 맞겠다'며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시위를 말리던 교사는 그 말을 듣고 '나는 데모를 막을 수밖에 없지만 너를 훌륭한 제자로 기억하겠다'고 답하는데, 그 말이 강철의 귀에는 '상상하고 싸우라'는 말로 들리는 것이다.

 

'상상하고 싸우라'는 구호가 좀 뜬금없다. 짐작건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프랑스 68혁명의 구호 '상상력에 권력을'을 염두에 둔 것 같다. 68혁명은 드골의 권위주의적 관료주의에 저항하는 정치혁명이었지만, 정치혁명을 넘어서 기존의 사회적 관습에 도전하는 문화혁명이기도 했다.

 

68혁명 세대가 몰두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마약이었는데, 마약을 하는 것은 기득권이 금지한 것을 행함으로써 기존 가치관 자체에 도전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다. 말하자면 68혁명은 '모든 사회적 금지에 대한 도전'이었다. 저자는 '상상하고 싸우라'는 구호를 통해 우리의 운동 역시 정치혁명을 넘어 문화혁명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상상하고 싸우라!


이 책을 읽으며 몇 권의 성장소설이 떠올랐다. 성순이 누나를 동경하는 장면에서는 '386세대의 허구적 자서전' <새는>이 생각났고, 꾀꼬리의 자태에 매혹되는 장면에서는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까지 읽으니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가 이 책과 가장 가깝다는 생각이다.

 

<남쪽으로 튀어!>의 주인공은 중학생 지로지만,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아버지다. 지로의 아버지는 아나키스트로 국민연금 납부를 거부하고, 국민연금을 받으러 집으로 찾아온 공무원에게 "체제에 빌붙어 사는 개 따위와 말을 섞을 마음은 없어" 같은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골치 아픈 사람이다.

 

지로는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며 무슨 사고나 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한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지로와 독자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버지의 싸움에 공감하게 된다. 체제가 부당하게 개인을 억압하는 이상, 맞서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산다는 것은 세상과 불화하는 과정이다. 자주 깨지고 세상에 패배하지만, 더러는 이기기도 하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상처받으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성장한다. 괴로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싸우는 것, 그것이 진짜 삶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하다. 상상하고 싸우는 것. '나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68혁명의 구호처럼 모든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것. 체제가 정해놓은 틀을 벗어나 그 너머를 상상하고, 체제의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는 것. 이제 금지된 행동을 시작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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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왓치맨 Watchmen 1~2 세트 - 전2권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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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수많은 슈퍼히어로 영화가 쏟아져 나오며 하나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그중에는 <엑스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흥행에 성공해 시리즈물로 제작되는 작품도 있지만 <고스트 라이더>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간 작품도 있다.

2009년 개봉한 <왓치맨>은 국내 흥행만 놓고 보면 소리 없이 사라진 쪽이다. 그러나 <왓치맨>을 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결코 별 볼 일 없는 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히스 레저의 명연기로 화제가 됐던 <다크나이트>와 비교하면 관객 수는 상대가 안 되지만, 그 깊이는 <다크나이트> 못지않다.

<왓치맨>이 괜찮은 영화일 수 있었던 것은 원작 만화가 걸출했기 때문이다. 혹시나 만화니까 유치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편견은 버리는 게 좋다. <왓치맨>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만화가 아니다. 종말로 치닫는 세상에 대한 묵시록이자  김낙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권력과 정의, 사회와 개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성찰 가운데 하나'다. 

전쟁과 평화 

<왓치맨>의 배경은 1985년의 미국.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미국사회는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주인공들은 한때 사회악에 맞서 싸우던 슈퍼히어로였지만, 이제는 은퇴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은퇴한 슈퍼히어로 코미디언의 죽음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은퇴 후에도 독자적으로 슈퍼히어로 활동을 하던 로어셰크는 코미디언의 죽음을 조사하며 거대한 음모가 배후에 있음을 직감한다. 그의 예감을 증명하듯 또 다른 슈퍼히어로 닥터 맨해튼이 사라지면서 소련과 미국의 전쟁은 점차 현실로 다가온다. 우여곡절 끝에 로어셰크와 그의 동료는 음모의 배후가 한때 자신들의 동료였던 에이드리언임을 알게 된다. 

왜 이런 짓을 저질렀냐고 묻는 그들에게 에이드리언은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이대로라면 전쟁은 결코 피할 수 없고,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야만 막을 수 있는 공동의 적을 만들었다는 것. 코미디언의 죽음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인다.

로어셰크와 동료는 에이드리언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만든 괴물이 뉴욕의 반을 날리고 미국과 소련이 이에 맞서기 위해 모든 적대행위를 멈추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고 혼란에 빠진다. 거짓 평화라 해도 이 평화를 깨뜨리고 세상에 진실을 알리는 게 옳은 일인가? 고민하던 그들은 침묵하기로 결심하지만, 로어셰크는 단호히 타협을 거부한다. 

 "아뇨. 아마겟돈이 오더라도 안 돼요. 절대 타협할 수 없습니다."

결국 에이드리언이 꾸민 음모의 희생양이기도 했던 닥터 맨해튼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로어셰크를 죽이고, 세상은 평온을 유지한다. 그러나 <왓치맨>의 결말은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게 아니라는 여운을 남긴다.  

에이드리언은 닥터 맨해튼에게 끝에는 모든 것이 잘 됐으니 자신이 옳았던 것 아니냐고 묻고, 닥터 맨해튼은 의미심장한 답변을 한다.

"'끝에는'이라고요?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에이드리언. 아무것도, 절대 끝나지 않아요."

<왓치맨>은 한 신문사 직원이 자료뭉치를 향해 손을 뻗는 장면으로 끝나는데, 그 자료뭉치 속에는 모든 것이 기록된 로어셰크의 일기장도 있다.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암시인 셈이다. <왓치맨>은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끝난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왓치맨>은 상당히 복잡한 텍스트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제목과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구 'Who watches the Watchmen(누가 감시자를 감시할 것인가)?'에 주목하면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 볼 수도 있고, 무능하고 무기력한 슈퍼히어로에 대한 조롱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로어셰크와 동료의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진실과 거짓에 대한 통찰로도 읽을 수 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방법이야 어찌됐든 평화가 찾아왔다. 이 상황에서 거짓된 평화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선택하고 참혹한 전쟁을 맞이할 것인가. "알았어. 나도 끼워 줘.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한다는 쪽에."라고 말하는 슈퍼히어로의 모습은 실망스럽지만, 저 자리에 내가 서 있어도 별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진다. 진실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는가? 진실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우리를 고통에 빠뜨린다면 그때도 진실을 선택해야 하는가? 진실이라는 게 그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일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거짓이 정말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수많은 시체 위에 쌓아올린 평화가 언제까지 갈 수 있을까. 닥터 맨해튼의 말처럼 끝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고, 이제까지 저지른 거짓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당장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을 알면서 진실을 선택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명확한 답은 없다. 그래서 <왓치맨>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만만치 않은 무게로 다가온다. 진실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줄 때, 우리는 고통스러운 진실과 평온한 거짓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여기까지 읽으면 너무 무거워서 부담감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왓치맨>의 미덕은 이처럼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타협하지 않는 로어셰크의 매력은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쟁쟁한 슈퍼히어로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 그의 일기 중 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개인적으로 후회는 없다. 인생을 살았고, 타협하지 않았다.…그리고 지금 불평 없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로어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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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과 이광재 - 노무현의 동업자들 운명에서 희망으로
박신홍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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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과 이광재>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나온 일종의 정치기획이 아닐까 생각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실장을 지낸 문재인이 최근 <문재인의 운명>을 내고 야권의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는 상황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 '좌희정 우광재'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치기획일 거란 의심을 했던 게 지나친 일은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정치기획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안희정과 이광재의 정치 역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종의 정치기획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같은 시절을 보낸 486세대의 이야기기도 하다. 뜨거운 가슴으로 학생운동에 투신했지만, 이제는 각박한 현실 속에 과거의 숭고한 이상을 잊고 살아가는 486세대의 자화상이다.

<안희정과 이광재>의 2장은 노무현을 만나기 전의 안희정과 이광재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안희정과 이광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19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든 운동권들 모두의 이야기다.

안희정은 자신이 '박정희 유겐트(히틀러의 소년 친위대 '히틀러유겐트'에 빗댄 말)'였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박정희의 '정희(正熙)' 두 글자를 뒤집어 그에게 '희정(熙正)'이란 이름을 지어줬다. 안희정은 그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장군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그러나 중3 때 야당 성향의 선생님을 만나며 그의 세계관은 변한다. 10·26사태가 일어나자 '국민적 저항에 직면한 독재정권의 자기 분열일 뿐'이라고 급우들 앞에서 일장연설을 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러시아 혁명사>, <역사란 무엇인가> 등을 읽으며 혁명의 꿈을 키운다. 대학에 간 것도 제대로 운동을 하기 위해서다.

반면 이광재는 의식적으로 학생운동과 거리를 두려 했다. 할아버지 형제의 자식들이 좌익 활동을 하는 바람에 어린 시절부터 늘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이과를 가서 공대에 들어간 뒤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자'고 다짐한다.

다른 듯 겹치는 안희정과 이광재의 '인생역정'

그러나 이렇게 다른 길을 걸었던 이광재와 안희정 모두 결국은 학생운동의 핵심 멤버로 성장한다. 이광재는 연세대 대표로 '전국 학생운동의 매뉴얼' <백만학도>를 만들었고, 안희정은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과 반미청년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렇게 둘의 인생역정은 다른 듯 겹친다.

고문이 두 사람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는 점도 같다. 이광재는 고문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결의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 손가락을 자른다.

'나 자신에게 나의 결의를 확인시켜 주고 싶다. 나의 몸에 나의 의지를 각인시켜 놓고 싶다. 이 길만이 내가 고문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안희정과 이광재> 80p

반면 안희정은 고문 앞에 무너진다. 안기부로 끌려간 안희정은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조차 실패하고 결국은 동료들의 이름을 분다. 그 경험은 안희정에게 엄청난 패배감을 안긴다.

희정은 이때 깨달았다. 더 이상 민주화운동의 주역은 될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런 자격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이제 거세당한 자에 불과하다는 걸.
- <안희정과 이광재> 89p

이광재는 고문을 이기기 위해 손가락을 잘랐고, 안희정은 고문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모두 1980년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들의 상처와 패배는 모두 1980년대와 밀착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1980년대 학생운동 기록의 성격을 띤다. 어떻게 '박정희 유겐트'가, 연좌제 때문에 평범하게 살고자 했던 사람이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됐는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내적 갈등과 고문 때문에 당한 고초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나타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시대의 기록이다.
'시대의 기록'에서 '그들만의 이야기'로 흐르는 책

그러나 이 책은 노무현을 만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시대의 기록이라는 미덕을 잃어간다. 이 책의 후반부는 486세대 모두의 이야기가 아니라 안희정과 이광재, 그리고 일부 친노 세력만의 이야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른 486 정치인들과도 구별되는 특수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안희정과 이광재를 통해 우리의 지난 시대를 되돌아보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는 후반부에서 실패하고 있다. 안희정과 이광재가 주인공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들의 정치적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으로만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노선에 대해 비판적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전반부는 흥미롭게 읽었지만, 이 책의 후반부를 읽으면서는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책만으로 안희정과 이광재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책의 옳고 그름을 집요하게 따질 생각은 없다. 그러기에는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평가가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두 가지는 짚어두고 싶다.

첫째, 그들의 통합에 대한 인식이다. 안희정과 이광재는 모두 이데올로기와 사상의 좌우를 넘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광재는 대학 시절부터 '나는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는다'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있었고, 안희정 역시 "이제 20세기의 모든 갈등과 혼란을 통합해내야만 해"라며 열변을 토한다.

그들이 말하는 통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좌우 '이데올로기'를 넘어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들 역시 일종의 통합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과 분열은 불가피하기도 하거니와 모든 갈등과 분열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총독부와 빚은 갈등, 혹은 민주화운동가들이 군사독재정권과 빚은 갈등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어둡고 팍팍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은 정치를 발전시키는 요소다.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갈등은 지양해야 하지만, 갈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둘은 갈등 자체를 절대악으로 여기는 듯하다.

둘째, 통일에 대한 이광재의 인식이다. 이광재는 '정치의 종착점은 통일의 시대를 여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며 북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풀어놓는다. 중국과 대규모 경제특구를 만들고, 극동과 알래스카, 캐나다를 철길로 연결하여 동북아시아를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자못 원대한 구상이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다. 여기에다 이광재는 화룡점정을 찍고 싶어 했다. 바로 남북한 FTA였다.

"나는 오랫동안 비스마르크에 천착했어.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등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독일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연구를 꽤 했지. 돌파구가 있었더라고. 바로 관세동맹이었지. 그때 깨달았어. 맞다, 해답은 FTA다. 월 10만 원짜리 노동력이 어마어마하게 생기는 거다. 남북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상생의 경제공동체 방안이 바로 이것이다."
- <안희정과 이광재> 320p

남북통일의 경제적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남북한 FTA가 올바른 방향인지는 논쟁의 대상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봐야 정확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남북한의 경제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경제력에서 밀리는 북한에게 불리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월 10만 원짜리 노동력이라니. 이쯤되면 '상생의 경제공동체'가 아니라 '착취의 경제공동체'로 보인다.

이광재와 삼성의 관계 등 더 따져보고 싶은 문제가 많지만, 여기서 줄인다. 필자가 제기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입장에 서든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를 보고 싶다

저자 박신홍은 에필로그에서 "겉으로 드러난 정치 행로보다는 둘의 인간적인 면모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고 밝힌다. 그의 말처럼 이 책은 '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보다는 '인간' 안희정과 이광재를 그리려 시도한다.

그러나 '정치인' 안희정, 이광재와 '인간' 안희정, 이광재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하가지 예를 들어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목격하고 충남도지사 출마를 결심한 안희정은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와의 오랜 인연을 중시했던 '인간' 안희정인가, 혹은 노무현의 정치 노선을 계승하려는 '정치인' 안희정인가? 어느 쪽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답은 둘 다일 수밖에 없다. 안희정이 충남도지사 출마를 결심했던 것은 '인간' 안희정으로서의 결심인 동시에 '정치인' 안희정으로서의 결심이었다.

따라서 '인간' 안희정과 이광재를 그리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정치 행로와 정치적 견해를 더욱 깊이 있게 파고들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한미FTA에 대해,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지방 분권화 추진에 대해, 이라크 파병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견해를 묻고, 그 견해의 기저에 있는 세계관을 따졌어야 했다. 그럼으로써 '인간' 안희정과 이광재의 면모 또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면모에만 초점을 맞추려 하다 보니 책의 성격이 애매해졌다. 전반부는 안희정과 이광재의 경험을 486세대 전체의 경험으로까지 확장해 시대의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띠지만, 후반부는 '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를 정면 돌파하지 않고 빗겨감으로써 감성적으로 이들을 옹호하는 정치기획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필자는 안희정과 이광재가 좋은 '인간'인지에는 별로 관심 없다.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라면 그들이 좋은 '정치인'인 것보다 좋은 '인간'인 게 더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좋은 '정치인'인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정치인' 안희정과 이광재에 대한 책이 나왔으면 한다. 그들의 정치적 공과를 평가하는 일은 아쉽지만 그때까지 미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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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 -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조영래 지음, 조영래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 창비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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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래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가장 치열하게 살다간 이 중 한 명이다.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우리나라 인권변호의 새 장을 열었'던 탁월한 인권변호사로 그는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위해 살다 갔다.

 

비록 그의 생은 43년에 불과했지만, 그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지상에 많은 것을 남겨두고 떠났다. 조영래가 남긴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고집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이다. 지인들이 조영래의 1주기를 맞아 엮어낸 이 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희망과 좌절의 시기


이 책은 조영래의 폭넓은 관심사를 반영하듯 다양한 주제의 글로 묶여 있다. 그가 담당했던 중요 사건에 대한 변론문과 표현의 자유, 교도소 내 인권유린 등을 법리적으로 바라보는 논설, 칼럼 등 공적인 글은 물론이고 사적인 편지와 일기, 시까지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글을 통해 인권변호사 조영래, 인간 조영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은 무게로 오늘날의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표현의 자유와 사회질서」라는 글의 마지막 문장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표현의 자유'는 그토록 무력한 것인가? '사회질서'란 그토록 고요한 것,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것, 죽음에 가까운 것인가? 그같은 침묵의 '질서'가 옹호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옹호되는 것인가, 아니면 파괴되는 것인가?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111p

 

그러나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을 꼽으라면, 그것은 '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는 역사적 격랑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5공에서 6공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5공의 폭압 아래 억눌려 있던 민심은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을 계기로 폭발했고,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 결과 우리는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러나 6월 항쟁은 절반의 승리였다. 양 김은 분열했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됐다. '새 시대'에 대한 기대는 좌절됐다. 5공이 만들어낸 양심수들은 6공 치하에서도 그들의 청춘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도 여전했다.

 

무엇보다도 5공청산이 실패했다. 전두환은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겠다"며 백담사에서의 수도생활을 마치고 5공청문회에 나왔지만, 청문회는 오히려 그에게 면죄부를 준 꼴이 됐다.

 

전두환씨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5공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불가피'한 것이었고 '숙명적'인 것이었다. 잘못된 것은 우리 국민들뿐이다. 그토록 국가발전을 위한 일념만으로 '군인의 길'도 희생하고 어려운 시대를 떠맡아 헌신한 전두환 씨의 진심도 몰라주고 온갖 '유언비어'로 모함까지 하면서 그를 1년 동안이나 백담사에서 고생을 하게 한 우리가 잘못이었다. 그것도 부족하여 무슨 더 '청산'할 것이 있다고 전직 국가원수를 국회 증언대 앞에까지 끌어내어 곤욕을 치르게 한 우리 국민들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던 것이다. 회개하여야 할 것은 우리 국민들이다. 바로 이것이 이날 청문회의 결론이었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258p


그래서 조영래는 5공청문회를 희대의 사기극이라 규정하고, 5공청산을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강간당한 기분이다. 이것으로 5공청산이 종결된다고 한다면 이 나라는 법도 없고 경우도 없고 도대체 존립하여야 할 도덕적 가치가 전혀 없는 나라가 된다. 우리는 '5공청산 종결'에 결코 합의하지 않았다. '5공청산'은 종결되지 않았다. 종결되기는커녕 이제부터야말로 '국민의 손에 의한 5공청산'의 엄정한 역사적 과제가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청산작업에는 '5공'만이 아니라 '6공'까지도 청산대상으로 포함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둔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259p


그러나 그는 끝내 5공청산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조영래의 글에서 좌절된 5공청산에 대한 분노보다 좌절을 읽어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갑제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이 책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 중 하나는 과거 조갑제의 모습이었다. 오늘날의 조갑제는 대표적인 보수 논객, 혹은 극우주의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회사 몰래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하다 해직되기도 했고, "김대중씨에게는 저 노벨상도 부족하다"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긍정하기도 했다.

 

특히 조갑제의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기자정신의 표본이라 할만하다. 사형집행 전에 오휘웅이 남긴 유언, 자신은 절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그 한 마디에 조갑제는 3년 동안 방대한 수사기록을 뒤지고 관계자를 만나며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다. 무서울 정도의 집념으로 사건을 파고들어 오휘웅은 결백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무고한 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사법제도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그래서 조영래는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를 '사법제도에 대한 이같은 맹목적인 신앙에 대한 드물게 보는 공개도전장'이라 평하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의 서평을 마무리한다.


우리는 눈을 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쓰인 이 절절한 기록-「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는 결코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259p

 

이 책의 4부는 조영래에게 바치는 추모의 글인데 조갑제 역시 추모의 글을 남겼다. 조영래 변호사를 친근하게 '조변'이라 부르는 그 글은 적어도 내 눈에는 진심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조변'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공장 주변의 진폐증환자, 스물다섯살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이 사회를 울리는 큰 의미를 뽑아냈다. 상처받은 권양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준 이야기는 오영수의 단편소설감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바로 '법을 배운 전태일'이었다.

 

'조변'은 꽉찬 80년대를 살았지만 결국 못다 핀 꽃이었다. 이것이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다. 그는 10년 정도를 담을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짧았던 43년보다 몇배나 더 오래 이어질 아쉬움, 추억담, 그리고 긴 여운을 우리 가슴속에 남기고 그는 표표히 떠났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362p

 

이 글에서 조영래와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조갑제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면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세월이란 그토록 힘이 센 것일까.

 

희망의 증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난 조영래의 빈자리가 새삼 느껴져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 '그가 떠나고 세상은 과연 얼마나 좋아졌는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조영래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90년이니 벌써 그 후로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그가 바랐던 5공 청산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전두환은 여전히 연희동 자택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얼마 전에는 전두환의 경호실장을 지낸 안현태가 "국가 안보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기도 했다. 조영래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들은 아직도 우리를 '강간'하고 있다.

 

사라져야 할 구시대의 유물들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건만 구시대에 맞서 싸웠던 사람 중 일부는 변절했다. 소위 뉴라이트의 지도부가 운동권 출신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사법제도에 대한 이같은 맹목적인 신앙'에 도전했던 기자 조갑제는 좌파에 대한 날선 증오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박정희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극우주의자가 됐다.

 

최장집의 문제적 저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의 첫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본다" 과연 조영래의 시대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얼마나 좋아진 것일까.

 

조금 우울한 마음으로 다시 책장을 넘기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다. 조영래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미국의 인권단체 ACLU(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가 낙태의 자유, 동성애자들의 인권 같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보고 '뭔가 소화가 안 되는 기분'이었다고 토로한다.

 

태아의 권리-생명의 존엄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냐? 이런 반문이 가능한 문제가 되면, 선악이 선명하게 구별되는(것처럼 느껴지는) 가운데서 선을 위해 투쟁한다는 메시아적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며 살아오는 데 익숙해진 우리로서는 뭔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요-그러나 어쨌든 미국 사람들은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애국자'들 이상으로 진지한 것같이 보이는데, 차차 시간을 두고 내 생각을 재검토하고 새로 정리를 해보아야 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282p

 

조영래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권에 대해 깨인 의식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그도 낙태에 대한 논쟁을 들으며 '심사가 매우 착잡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낙태에 대해 토론하면서 그런 기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적어도 그만큼은 한국 사회가 발전한 것이 아닐까.

 

본디 세상의 진보란 그토록 더디게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짧은 시각에서 보면 6월 항쟁과 같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도 세상을 크게 바꾸지는 못하는 것 같다. 전두환을 비롯한 구시대의 인물들이 건재한 것처럼.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희망을 지켜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만이 그나마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조영래는 5공의 민주주의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5공 말기에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모두가 갑갑해하고 있지만 먼 훗날에는 이 시대를 아름답게 추억할 겁니다. 인권, 자유, 평등과 같은 고매한 이상을 주제로 하여 나라 전체가 토론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멋진 일 아닙니까?"


그의 말처럼 지나고 보면 우리도 지금을 아름다운 시기로 기억할지 모른다. 문득 책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희망 역시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만 묶어 둘 수는 없다. 우리가 희망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의 희망은 희망에 그치지 않고 언젠가 현실이 될 것이다. 이 길고도 두서없는 글의 마무리는 하종강의 책 제목으로 대신하고 싶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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