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월 5일, '사상의 은사' 리영희가 세상을 떠났다. 200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0여 년 투병생활의 끝이었다. 고인은 평소의 바람대로 망월동 국립518묘지에 안장됐다. 떠나간 이를 생각하며 오늘날 리영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하기 위해 <리영희 프리즘>을 집어들었다. 70년대 학번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세대를 넘어선 지식인들의 눈에 비춰진 리영희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잊혀진 '사상의 은사'

 

시인 고은은 '70년대 대학생에게는 리영희가 아버지였다'고 노래했지만, 2010년의 한국 대학생들에게 리영희는 낯선 이름이다. 한윤형은 '2000년 이후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청년들에겐 아마도 강준만이나 진중권, 박노자 정도가 자신의 지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이제 대학 사회에서도 매우 한정된 영역의 일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물며 리영희야 말해 무엇 하랴.

 

천정환이 '오늘날 리영희라는 필독서를 아는 대학생은 거의 없다'고 말했듯 12월 5일에야 리영희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본 대학생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 역시 리영희의 저작 중 <대화>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만을 읽어봤을 뿐이다.

 

사실 리영희 자신도 더 이상 자신의 책이 읽히지 않는 세상을 바라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고인도 원하지 않았는데 이미 잊혀진 이름을 다시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은 부족하나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리영희, 그 논쟁적인 이름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리영희가 누구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리영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리영희는 언론인이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등의 저작은 극우·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해직과 투옥을 반복하는 등 개인적인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펜 끝은 항상 권력의 심장부를 노리고 있었다.

 

리영희는 오랜 세월 논쟁적인 이름이었다. 그의 글은 많은 이들에게 '몽롱한 의식에 끼얹는 찬물 한 바가지'였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한편에서는 그를 '사상의 은사'라 불렀고, 반대편에서는 '의식화의 원흉'이라 불렀다. 수많은 시국 사건의 뒤에 그가 있었다.

 

"난 모든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계한 일은 없지만 거의 모든 사건의 '간접적 주범'이 됩니다. 주범인 문부식, 김은숙 두 사람의 재판에도 나는 증인으로 불려 나갔어요. 내 책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들이 진술했으니까."

 

그래서 강맑실은 리영희를 "시대의 흐름을 이끈 1970~80년대 학번들의 이념적·사상적 출발점"이라 평가한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 역시 리영희의 영향력을 인정한다. 윤평중은 그가 남긴 비체계적인 인본적 사회주의가 우리 사회를 시장맹(盲)·북한맹(盲)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도, 2007년 경향신문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지식인'으로 리영희를 꼽았다. 그러면서 리영희를 이렇게 평했다.

 

"리영희 선생은 민주화 운동 시기의 젊은 세대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시대적 패러다임을 형성했고 그 여파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지속됨으로써 현대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보수 진영이나 우파에서는 그 특유의 이론적 빈곤이나 도덕적 결함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할 만한 인물이 전혀 부재하다."

 

그를 둘러싼 양쪽의 평가에서 드러나듯, 어떤 의미에서든 리영희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항상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가장 뜨거운 이름이었다.

 

우상파괴자 리영희

 

그러나 가장 논쟁적인 이름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리영희를 호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한윤형이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70년대의 리영희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듯 지금에 와서 보면 리영희의 오류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다시 리영희인가. 그가 저지른 오류에도 불구하고 리영희가 아직 잊혀져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리영희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우상을 거부하고 진실을 추구하던 자세, 그것이 리영희의 유산이다.

 

리영희가 평생 싸워온 적의 이름은 우상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반공주의, 미국중심적 우상과 싸워왔다. 우상에 맞서기 위해 그가 선택한 무기는 '글쓰기'였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곳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 <우상과 이성> 머리말 중에서

 

동시에 그는 자신 역시 어떠한 우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성찰했다. 1991년 리영희는 '사회주의의 실패를 보는 한 지식인의 고민과 갈등'이란 강연에서 현실사회주의의 패배를 인정했다. 수많은 리영희의 제자들이 배신감을 토로했지만 그는 '주관적 오류나 지적 한계가 객관적 검증으로 밝혀질 때,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은 없다'고 답했다. 그는 어떠한 우상이나 도그마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추구했다. 그래서 강준만은 리영희를 '성찰의 대부'라 평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후배들에게 우상으로 군림하게 될 것을 저어했다. 김현진은 리영희와의 인터뷰에서 청년 실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고의 말을 부탁한다. 그는 괴테를 인용하며 '내 충고에 따르지 않겠다는 조건하에서만 충고를 하겠다'고 말한다.

 

이렇듯 그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우상을 거부했다. 리영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허위의식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항상 자기 머리로 생각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누구보다 앞서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수많은 이들의 모범이 됐다.

 

리영희를 '사상의 은사', '생각의 스승'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훌륭한 '정보'나 '견해'를 들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 <리영희 프리즘> 16p 중에서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이라던 평소의 지론처럼 리영희는 권력의 억압은 물론이고 사상적 일관성이나 진영 논리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있었다면 단 하나, 진실이었다.

 

이쯤에서 우리는 현실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안수찬은 '단독자 기자는 사라지고, 부속품 기자만 넘쳐난다'고 한탄하고, 이대근은 '지식인들이 새로운 권력이라는 시장에서 자기 지식을 거래하는 상인이 된 듯하다'고 비판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우리를 둘러싼 허위의식과 우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 혹독하던 시대의 리영희보다 민주화된 시대의 우리는 자유로운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