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4 - 임진왜란 ㅣ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4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신병주 감수 / 민음사 / 2015년 10월
평점 :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모습을 대한민국 초대 지도자 이승만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수도를 사수하겠다면서 한강철교를 끊어 버리고 부산까지 도주한 이승만과 한양을 버리고 중국망명을 생각하고 의주까지 피난을 간 선조. 임진왜란 발발 이전까지 세자책봉을 계속 미루던 선조가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분조를 이끌게 한것은 자신이 조선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것이라 할수 있겠다.
하지만 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승전보와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으로 중국망명이 필수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면서 선조의 생각도 점점 바뀌어 간다. 전쟁을 통해 장수나 의병장들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들의 공을 폄하시키는가 하면 분조를 이끈 광해군의 명성이 높아지자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한 잦은 선위파동은 참 가슴을 갑갑하게 한다.
권력에 대한 집착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상대로 한 사기질, 또 한가지 공통된 병크짓은 자신들을 지원 온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나도 심하여 종속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구두로 전작권을 미국에 넘겨버렸고, 선조는 명나라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강화회담에서 전혀 목소리를 낼수 없었으며 일본군이 철수할때 전혀 공격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려보낼수 밖에 없었다. 명나라의 목표는 왜군이 요동지역, 즉 자신들의 영토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지 왜군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처음 왜군을 과소평가하던 명군은 벽제관전투에서 왜군에게 대패한 이후로 그들과의 전투를 회피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모든 공을 명나라의 공으로 넘기면서 ‘재조지은’으로 대표되는 명에 대한 의리와 종속적인 태도의 선조의 모습은 아니라 일본군을 괴멸시킬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놓치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전쟁을 장기화시켰다고 볼수 있다.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에 책 한권을 전부 할애하고 있는 것만 봐도 임진왜란이 조선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 그 비중을 알만하다.
조선과 왜 그리고 명나라까지 약30만명이 참전한 국제적인 전투였으며 훗날 만주지역의 여진족을 통일한 누루하치의 후금은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하였으며, 일본 역시 에도막부가 들어서게 된다. 조선은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는 않았지만 전 국토가 유린되었으며 급격히 악화된 국력은 30년뒤 병자호란이라는 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선조때만큼 인재풀이 거대했던 적이 없다고 한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을 형성했지만 선조는 이들간의 견제를 통해 왕권을 공고히 하고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경장에 좀 더 힘썼더라면 임진왜란 당시 전국8도가 유린당하는 일은 없었을거라고 생각된다. 순식간에 한양까지 올라온 왜군에게 겁을 먹은 선고 굳이 너무나도 급하게 명나라의 원군을 청한것도 아쉬운 이야기다. 이순신과 의병장들의 활약상만으로도 명의 원군이 굳이 없었더라도 우리의 힘만으로도 왜군을 충분히 격퇴할수 있지 않았을까. 이미 보급로가 차단되어 있고 육로를 통한 보급로 역시 의병들에게 의해 막혀있던 상황에서 명나라는 오히려 일본의 구원자같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훗날 재조지은과 광해군 책봉을 무기삼아 명나라 사신들이 부린 횡포, 병자호란 발발 이전 가도에 주둔했던 모문룡의 횡포나 명의 원군요청에서 보여진 광해군과 서인세력간의 갈등을 보건데 만약 명에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이 과거의 의리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외교력을 행사할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드는건 어쩔수 없는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역사는 이미 일어난 일, 과거를 거울삼아 미래를 대비한다는 말이 있다. 허나 지금 보면 과거를 뉘우치고 반성하기는커녕 과거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듯한 모습을 볼때가 많은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