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내게 간병은 머나먼 세계를 너머 '전혀 딴 세계' 이야기였다.

여태껏 사람은커녕 비인간동식물 하나도 온전히 책임져보지 않은 채 살아왔고, 앞으로도 당분간은ㅡ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안정을 얻어 누군가를 책임질 '준비'가 될 때까진 누군가를 돌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돌봄, 간병, 책임 따위는 내가 원하는 게 아녔다. 내게 가장 중요한 건 그들 아닌 나의 안위였기에. 그런 맘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책의 밑둥을 감싼 아이보리 띠지 속 '간병'이니 '돌봄' 같은 단어가 내게 어떻게 다가왔겠는가? 우선 자극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간간이 접했던 '간병살인' 이슈가 떠올랐다. 부모 혹은 아이를 돌봐야 할 자들이 그 의무를 저버리고 심지어 돌봐야 할 자를 처절히 파괴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사건들도 떠올랐다. 돌봄의 울타리에서 떨어져나간 '은둔형 외톨이'들, 자발적·비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한 이들도…. 떠올림에 한도 끝도 없었다. 타인의 존재를 통해 자신('나')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인간에게 타인의 관심과 돌봄이 필요없을 리 만무한데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해서, 혹은 누군가를 평생 '적절하게 돌봐야' 하는 현실을 견디지 못해서 자타를 해치는 결말에 이르는구나ㅡ 싶어 맘이 무거웠다. 그 맘에 지레 겁먹어 차일피일 책 읽길 미뤘다. 


 23년 6월 16일 아침, 할머니가 끓여놓으신 우거지국 냄새를 맡으며 일어나 뭘 하며 오늘을 보낼까 궁리하던 주인은 그제야 책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그를 펼쳤다. 계곡물에 몸을 맞대듯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던 주인은 어느새 그 안에 완전히 젖어들었다(우거지국 리필해 먹으며 계속 독서함). 차갑고 무섭고 무거워보였던 글은 들어가보니 마냥 그런 것만도 아녔다. 인물의 손목 발목을 붙드는 가난, 고립, 예상치 못했던 사건사고의 중첩, 연이은 좌절과 깊어지는 절망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가 '돌봄'이라는 같고 다른 짐을 진 이들('명주'와 '준성')이 서로를 인식하고 만나고 뻘쭘해하고 의식하고 궁금해하고 대화하고 돕는 장면에서는 꽉 틀어막혀 있던 혈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솔직히 책을 다 읽고 다른 작가·평론가들의 평까지 꼼꼼히 읽어내리면서도 '무엇이 희망인가?'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그런고로 "희망을 보았다."라는 말에 잠시 괄호를 씌워놔도 좋을 것이다. 내 언어가 아닐 수 있으니). 


 책의 마지막 장면ㅡ흰눈 나리는 겨울의 도로 위, 홀로 어머니를 돌본 명주와 은혜요양원에서 도망쳐나온 할머니가 서로에게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평화로운 풍경 옆에서 홀로 아버지를 돌본 대리기사 준성이 트럭을 몰며 "비록 눈길이긴 해도, 지금 가는 곳이 얼마나 멀고 낯설든, 분명 그곳에서도 복귀 콜을 받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터무니없는 믿음"이 마음에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짓는 장면에서도 도저히 맘이 놓이지 않았다. 눈길은 위험하고, 그들이 빌린 트럭 뒤에는 세상에 들켜선 안 될 것이 숨겨져 있으며(요양원에서 도망친 할머니도!), 아파트 입구서부터 들려온 경찰차 사이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상만으로도 이리 위태로운데 당사자인 준성은 정작 미소지으며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이다."라고 중얼거리니, 이 무슨! 어떤 문제도 맘을 놓을 정도로 해결되거나 매듭지어지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희망을 느낀다 그러고! 뭐야. 나만 불안해? 나만 위태로워? 있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문제가 겹쳐오면 어떡하지? 너무 걱정돼!


 주인공인 '명주'와 '준성'은 그들의 겨울을 지나왔는데 난 아직 내 겨울을 지나오지 못한 것 같다. 실은 겨울을 맞아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명주'와 '준성',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들의 사계에 함부로 말을 얹을 수 없음은 물론 그들의 절망과 희망에 공감할 수도 없다. 감동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분명 그들의 희망을 "보았"고, 각자의 고통 속에 침잠해 있던 그들이 함께하며 믿음과 평안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에 맘이 동했으나 그들과 같은 절망에 휩싸여본 적 없기에 희망에 이르지도 못했다. 사회와 관계의 안전망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느껴보지 않은 희망을 느꼈다며 자타를 기만하는 것보다 '나는 아직 절망도 희망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편이 나아보인다. 그게 진실이기도 하고.


 "모든 건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고, 돌봄은 남겨진 누군가의 몫이 되지."


 그러나 이 문장은 하나의 계시처럼 느껴진다. 내게도 감당키 어려운 "모든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날이 올 거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가 노란 보따리 겨우 하나 안고 다가와 손목 발목을 움켜쥐며 "제발 날 데려가줘."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것이 운명임을 알아차린다면 1+1 상품처럼 절망이 함께 따라들더라도 받아들이는 길뿐이겠지.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단 걸 인식하는 것만으로 삶이 변화했듯 이 한 문장은 나를 변화시켰다. 돌봄을 딴 세계 딴 사람들의 일이라 치부했던 몇 시간 전 나는 이제 없다. 회피하고 부정해봤자 소용도 없다. 오롯한 돌봄, 우호적인 세상에서 성장한 덕에 지금의 내가 되었음을 습관처럼 상기하고, 그 빚을 갚는 길은 운 좋게 내가 받은 것을 타인과 세상에 환원하는 데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갑작스레 도래한 긴 겨울을 "우리"가 되어 지날 수 있을 것이며 겨울이 지나고서도 내게 필요한 "우리" 안에 당당히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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