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우고, 다시 채우고 - 삶이 어엿함을 잃지 않도록 내 속에 말을 담고, 내 안의 생각을 비워내다
이가경 지음 / 북스고 / 2023년 5월
평점 :
책을 읽은 지 얼마 안 됐을 때 받은 느낌은 '무척 추상적이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장르는 '에세이'이고 에세이에는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과 체험이 진솔하게 담겨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구체적인 경험의 내용보다 사고의 과정과 결론을 담아내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재작년 11월, 월출산 자락 낙엽길을 거닐다 문득 생각했다."와 같이 시간과 공간, 일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보다 "어느 가을 낙엽길을 걷다 문득 생각했다."라는 식으로 간단히 서술하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사용하는 단어들도 에세이보다 연구 논문이나 비문학 서적들과 가까운 느낌이었다. 신기하긴 했는데 저자의 경험세계와 정서에 몰입은 잘 안 됐다. 20대로서 2030 세대를 뭉뚱그린 대목에선 언짢기도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저자의 정서에 휩쓸리지 않고 내 경험, 생각, 정서에 반응하며 독서할 수 있었다. 시사잡지 읽을 때처럼, 소설 분석 과제할 때처럼 적극적으로 메모했다. 동의하기 어려운 단어에는 빗금을 쳤고 덧붙이고 싶은 말은 각주처럼 글 끄트머리에 달아놓았다. '객관'과 '거리두기'를 중시하는 듯한 저자의 글의 특성이 이러한 반응을 야기한 듯하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스타일에 적응이 돼서 조금 더 편안한 맘으로 읽었다.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맘에 들거나 공감이 되는 글귀가 많기도 했다.
우리는 각자의 대장간을 제대로 책임지는 대장장이가 되어야 한다.
(「무기가 되는 말」, p. 50)
온전한 성공이라 함은 하나의 성취가 아니라 고른 성장의 평균값이다.
(「생각한 대로」, p. 85)
경험이 현재에 산다면 기억은 과거에만 산다. 그 때문에 기억을 재편하는 일보다 지금의 경험을 잘 다스리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다.
(「기억과 추억」, p. 160)
어둠을 맞는 일은 제 안의 문제들로 빛어낸 결과가 결코 아니다. 단지 어둠이 찾아올 때라서 그렇다. (...) 어둠에 사로잡힌 저 자신을 탓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어둠을 이겨보려는 거센 대항력도 필요가 없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러한 어둠 속에 잠잠히 침잠하는 것, 어둠을 익숙하게 받아들여 감화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어둠의 효용성」, pp. 200~201)
끝없이 나아져라! 성취하라! 소비하고 소유하라! 성공하라! 라고 닦달하는 세상에서 고독, 멜랑꼴리, 어둠, 비움을 예찬하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반갑고 힘이 났다. 감탄이 절로 나온 멋진 문장도 몇 개나 발견했고! 무엇보다 모름, 서툶, 비움을 수용·긍정하려는 요즘의 나이기에 "괜찮아, 좋아, 잘하고 있어."라는 칭찬을 들은 듯 기분 좋았다. 채우려 애썼던 만큼 차분히 비워서 그 안에 새로운 것들이 환희롭게 들어차기를 기대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