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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
윤설 지음 / 메타 / 2023년 5월
평점 :
『오프』 시대의 사람들은 면대면 소통보다 인공지능에게 지시 내리고 돌봄 받기에 훨씬 익숙하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을 갈망하지 않게 만들었다.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들은 한없이 이타적이고 무해한 인공지능에 완전히 매료, 중독되어 사랑이 아닌 쾌감의 충족만을 바랐다. 그것이 효율적이고 이득이고 자연스러워서 사랑과 연애는 구닥다리 유물인 종이책 속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런 종이책을 소장하고 있단 이유만으로 복고주의자, 반정부주의자라는 오해를 받는 주인공 해준을 보아 기득권의 감시와 통제가 삼엄한 사회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도 사회도 사랑과 연애를 바라지 않았다. 모호하나 맹목적이며 더 나은 인간-되기와 사회-되기를 바라게 하는 사랑이란 것은 그들에게 위험 분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테러단의 소행으로 모든 인간과 인공지능을 연결하는 선이 끊어진다("OFF(오프)"). 해준은 당황하지만 집 안에 있으면 곧 정부가 해결할 거라는 생각으로 애써 진정한다. 그런데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공포감에 열지 않으려 하지만 낯선 이의 흐느낌과 위태로움이 해준의 마음을 연다. 낯선 여자의 이름은 '나미'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며 스스로 자원해 '트랜스휴먼'이 되었다 했다. 트랜스휴먼의 뇌는 슈퍼 컴퓨터와 연결돼 있다. 말하자면 나미는 '초'인간이자 '초'컴퓨터다. 인간은 지닐 수 없는 컴퓨터의 능력을 지닌 동시에 컴퓨터는 지닐 수 없는 인간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례적인 "OFF" 상황이 도래하며 매순간 무한한 정보가 흐르던 나미의 뇌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인 것이다. 어마어마한 공포감과 고독감에 휩싸인 나미는 공황 상태가 되어 옆집 문을 두드렸고, 그렇게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둘은 서로의 눈을 깊이 응시하고 몸을 맞대고 대화 나누며 처음으로 누군가와 연결된 느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충만함을 느낀다. 그러나 OFF 상황이 해제되고 나미가 다시 슈퍼컴퓨터 같은 존재가 되자 해준은 지난밤 자신이 느낀 감정을 부정하고 다시 나미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려 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그렇게 간단히 포기하고 없었던 셈칠 수 있는 게 아닌지 나미 없는 해준, 해준 없는 나미는 각자의 고독 속에서 말라간다. 해준은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신이 몸담고 있으나 내내 회의를 느꼈던 '러브온(인공지능 파트너와의 섹스를 통해 욕구를 해소하는 플랫폼)'에 자발적으로 접속하기도 한다. 둘은 서로를 원하고 사랑하고 싶어하지만 새로운, 아니 전보다 더 견고해진 벽들이 둘 사이를 막아선다. 둘은 과연 다시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소설의 끄트머리에 다다를 때까지도 어떤 결말이 날지 상상이 안 됐다. 나는 '둘이 함께하지 못한대도 각자의 마음 속에서 서로를 그리며 살아가면 그것도 사랑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자는 '사랑=관계'라는 등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관계란 개인의 감정이나 상상 따위가 아니다. 나와 다른 존재에게 내가 바라는 것을 이기적으로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관계란 나와 다른 존재와 몸과 맘으로 만나 소통하고 불통하며 부대끼는 행위 그 자체다. 그 과정에서 애정, 미움, 고마움, 미안함, 슬픔, 언짢음, 평화로움 등 다채로운 마음을 만나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을 일일이 말하기 뭐해 우리는 그것을 그러모아 '사랑'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사랑은 관계이고 관계는 곧 사랑이다. 내가 생각한 '서로를 만나지 않는 사랑'은 어쩌면 사랑이라기보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 보고 싶은 마음, 미련, 애달픔에 더 가까웠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감정이 골짜기를 타고 깊어져서 몇 시간 동안 애먹었다. 곧 괜찮아졌지만.)
쉽사리 해석되지 않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사랑'이 이 책을 읽고 한 생각들에 의해 가지런해지는 걸 느꼈다. 모두가 '재앙의 밤'이라 불렀던 밤("OFF")이 해준과 나미를 사랑하게 만들었듯 이 책이 나도 "OFF" 상태로 만든 것 같다. 그 몇 시간 동안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고 지독히 외로웠다. 지나간 사랑이 아팠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 마음을 인정하고서야 내가 바로 보였다.
아... 나 사랑하고 싶구나.
단조로워 힘들고 복잡해서 힘든 세상 속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은 온전히 마음을 내주고 싶구나.
온갖 역경 속에서도 단 한 존재의 이름을 떠올리며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 싶구나.
사랑을 바라는 마음은 이기심도 미성숙함도 나약함도 아닌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구나.
SF가 이래서 좋다. 먼 미래와 고도로 발달한 기술(에 대한 "상상!")을 빌려 조금 더 극단적인 가정법을 쓸 수 있으니까. 재미도 재미지만 현재의 나/우리를 새로운 눈으로 보는 데 큰 도움을 줘서 고맙기도 하구. 사실 SF고 뭐고 장편소설을 읽은 것 자체가 무척 오랜만이고, 독서 동기도 그저 쨍하고 선명한 표지 속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인물의 표정에 이끌렸던 것뿐인데 예상보다 더 깊이 몰입하고 '사랑'에 대해서도 유의미한 통찰을 얻었다. 엉겹결에 얻은 수확이라 아직도 얼떨떨하다. 사람이 책을 선택할 때 책도 사람을 선택한다는데 그게 온라인까지도 포함하는 말이었나? 너무 많은 것들에 과하게 연결돼 있던 나를 잠시 "OFF" 시키기 위해 이 책이 내게 찾아왔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덕분에 사랑하고 싶어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