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복 같은 소리 - 투명한 노동자들의 노필터 일 이야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기획 / 동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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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 순으로 단정하게 나열된 노동자들의 일터를 훑어보면서부터 몰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곳에서 그토록 중요한 일을 맡아하는데도 단지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받는 차별, 배제, 불이익이 많겠지. 그런 글들을 만나게 되겠구나.' 생각하며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 난 지금 각기 다른 개인들의 생활사를 읽은 소감을 뭉뚱그려 말하긴 뭐하지만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흥미로움'이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로 근무했었던 친구들에게 들었거나, 노동하진 않았지만 관심이 있는 분야라 개인적으로 알아보았던 몇몇 곳 말고는 지극히 낯설어서 읽던 글에 마침표가 찍히고 다음 글로 넘어갈 때마다 '다음은 어디? 오!' 했다.

소비자로서 들르거나 이용해봤지만 누군가의 일터로는 인식하지 못했던 공간들이 글을 읽는 동안 자연스레 현장의 노동자의 목소리를 통해 재구성되었고,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노동자들이 조금씩 다른 생각과 감정을 담아 자신의 노동 현장과 노동사를 서술한 것이 좋았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노동자 모두가 불같이 화를 내거나 둥둥 북을 치며 거리를 행진하지는 않기에.) 소설 같이 느껴지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 책은 소설집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누군가가 치열하게 살아낸 현실를 허구나 꾸며냄으로 치부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다들 글 자체를 너무 잘 쓰셔서 기본적으론 술술 재밌게 읽었다.

픽션을 써내는 작가들이 획득하려 노력하는 구체성과 리얼리티가 이 마흔네 편의 이야기에는 아무런 이질감 없이 녹아 있어서 소설을 많이 읽은 내겐 이 이야기들이 '잘 쓰인 소설'처럼 느껴진 것 같다. 그러나 잘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 인물의 목소리가 결코 담아낼 수 없는 생동하는 에너지가 이 책에는 담겨 있었다. 허구 속 인물의 서사도 기획자나 편집자의 의도대로 구성된 탐사보도도 아닌 개개인이 직접 말한 자신의 삶이자 노동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밑줄쳐둔 글귀들을 모아보니 표현 방식이 조금씩 다를 뿐 같은 사람이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사한 정서가 느껴졌다.



그런데 이 마흔네 명의 노동자이자 작가는 나보다 훨씬 강하고 현실적인 사람이어서(보통 이런 분들을 어른이라 하지 🙂) 화내고 서러워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개인들에게 분노를 돌리지 않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람 아니게 하는 기득권의 행태와 안전망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제도를 문제 삼는다. 그리고 함께 가자고 한다. 서로 다른 우리(We)를 비정규직이라는 우리(cage) 안에 넣고 부당한 대우를 일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용기를 내겠다고 다짐하고,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운동의 언어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연결과 상생을 도모하는 연대의 언어로 매듭지어지는 글들이 참 좋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노동자들을 갈등하게 하고 와해시키는 제도'라는 말이 있었다. 그 말에 동의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듯 모든 노동은 값지고 모든 노동자는 귀하다. 업무의 특성, 노동 시간 등에 따라 지급되는 비용이 달라질 순 있지만 고용 형태가 인간을 차별할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현 한국 사회는 분명 문제가 있다. 천부 인권, 국민으로서 권리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보장되지 않는 사회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다.

"난 비정규직 아닌데. 그런 대우 받기 싫으면 다른 일 찾지 그랬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해, 서로 연결되어 공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처우를 개선해야 하는 거라고. '그들'이 곧 '우리'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면 차근차근 악화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는 반드시 배드 엔딩을 맞을 거라고 말이다.

기대가 컸는데 그보다 더 좋은 책이었다. 나처럼 사람 사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언론이 제시하는 단편적인 노동자의 목소리와 이미지에 지쳤거나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 노동자가 존중 받는 사회가 곧 사람이 존중 받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사실 노동하고 있거나 노동하게 될 모든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다. 마흔네 명의 노동 이야기, 삶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따라가다 보면 어떤 자극적인 헤드라인이나 잘 쓰인 기사도 느끼게 하지 못했던 것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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