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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는 게 좋아요
이형정 지음 / 언제나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제목에서부터 귀엽게 티가 나듯 노랑복실이 '찰수'는 미끄러지는 걸 무척 좋아하는 강아집니다. 재밌게 미끄러지는 기막힌 방법들을 알고 있고, 미끄러지기 위해 높은 언덕을 기꺼이 올라가요. 이 점이 무척 재밌었는데요. 우리네 인생사를 이야기할 때 대개 '올라가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고 '내려가다/미끄러지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찰수는 미끄러지기[좋아하는 것을 하기/행복해지기] 위해 올라가는[용기를 내는/기다리는/견디는] 게 신기했어요(의미의 전환!). '올라가는 걸 좋아하는 이에게는 미끄러움이 위기일 텐데 미끄러지는 걸 좋아하는 이에게는 언덕이 위기가 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했고요. 각자의 행복이 다른 것처럼 각자의 위기도 다른 거겠죠? 아니, 애초에 무엇을 '행복' 무엇을 '위기/불행'이라 명확히 단정할 수 없는 게 인생인 것 같기도 하고요. 🤔
미끄러지는 걸 좋아하는 찰수에게는 미끄러지기 위해 올라가는 과정까지도 행복인 것 같아 보였어요. 행복이 결과값이고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은 견뎌냄, 인내, 고난, 불행일 수밖에 없다는 관념을 시원하게 비껴갔죠. 얼마 전 콘서트에서 직접 들은 신지훈 님의 신곡 <겨울동화>의 가사 일부가 떠오르기도 했어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결과[결말]중심적 사고, 결과[결말]을 향하는 과정을 무의미하게 여기게 만드는 사고에서 "아차!" 하며 벗어날 수 있었거든요.
책 속 찰수의 표정은 시종일관 밝아요. 미끄러지는 순간이 가장 짜릿하긴 해도 그렇지 않을 때라고 웃음을 잃진 않아요. 왜냐하면 찰수는 스스로 행복해지는 법과 행복과 불행이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행복해지기 위해 기꺼이 고된 언덕도 오르고 어둠도 갈라내거든요.
또 찰수는 함께 미끄러지면 재밌단 걸 알지만 혼자서도 미끄러짐을 즐길 줄 알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지내며 외로움을 크게 느낀 한 해였어서 이 대목에서 가장 큰 위로를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혼자<함께'라는 공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 책도 그렇게 끝날까 봐 살짝 겁이 났는데 그러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혼자 있을 때의 행복과 함께 있을 때의 행복은 제겐 아예 다른 영역의 것이어서, 비교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 둘 다 꼭 필요하거든요. 저자가 찰수를 혼자서도 함께일 때도 행복할 수 있는 인물로 그려주어서 참 좋고 고마웠답니다.
어른이 읽어도 아이가 읽어도 따뜻한 용기를 받아갈 수 있는 그림책, 『미끄러지는 게 좋아요』!
눈 내린 겨울날 읽으시면 마음만은 따뜻함으로 충만해질 거라 확신합니다. 추천해요 :)
※ 본 포스팅은 도서를 증정 받아 쓰였으나
가감 없는 개인적 경험 및 감상만을 담았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