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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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목차는 단순하다. "1부 고향 1910~1933", "2부 모국 1939~1962." 이야기는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들거나 이야기 속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등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거나 왜곡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의 연도표와 같이 시간순으로, 위에서 아래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그 이야기 속에서 주가 되는 건 4대에 걸쳐 이어지는 한 가족의 삶이다. 부산 근처 영도에서 고기를 잡고 하숙을 치며 살아가던 한 노부부, 어렵게 살아남은 그들의 아들 훈이와 중매쟁이를 통해 그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양진, 부부의 사랑 속에서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난 선자, 일본인 학생들에게 모욕을 당하던 선자를 영화 속 히어로처럼 나타나 구해준 한수, 병약한 몸으로 형을 만나러 평양에서 오사카로 가던 길 양진의 하숙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 이삭...

차근차근 글을 읽어내리며 인물들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노라면 내 할머니 할아버지의 낡은 앨범을 펼쳐들고 그들의 탄생과 유년 시절, 청소년기와 청년기, 성인기를 한 장 한 장 넘겨봤던 때와 유사한 느낌을 받는다. 매력적인 이야기의 주연들이자 지금 나를 여기에 있게 한 나의 조상들의 캐릭터(형상)인 그들이 한 명 한 명 귀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 혼란한 시대 속에서 주어진 하루하루를 온힘을 다해 살아낸 강인한 존재라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또 국권이 찬탈당해 내 이름 자식의 이름 하나도 지키지 못했던 침통하고 비참하고 파란만장한 시기를 살았던 이들의 삶은 역사 교과서에 실린 그 시대 사진들처럼 모노톤일 것 같았는데 그들의 생도 영도의 투명하고 푸른 바닷물처럼, 그 바닷물에 부딪치고 부서져 찬란했을 햇빛처럼 또렷하고 생생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아, 그래서 소설의 디자이너는 책 표지를 그토록 환하고 고운 색과 모양들로 꾸며 놓은 걸까? (역시 책 표지는 독서 전 한 번, 독서 후 한 번은 봐야 한다!)

아무튼 번역체 특유의 느낌은 남아 있으나 어렵지 않은 문체로 옮겨진 소설을 읽다 보면 한 가족의 생애에 자연스레 몰입하게 되고, 그들이 웃고 우는 순간들을 함께 경험한 느낌에 자연스레 그들을 마음에 담게 되고(나는 이걸 사랑하게 된다고 표현하고 싶다.), 억지스럽거나 교훈적인 느낌 없이 가족애는 인류애로 확장된다. 이 작품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들을 보면 내가 다만 한국인이라서 이러한 과정을 겪은 건 아닌 것 같다. 하긴 이 책은 미국 등 외국 사람들에게 먼저 널리 읽히고 여러 차례 인정 받고 나서 한국어로 번역돼 내게 왔지. 베스트셀러라고 '아묻따(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 작품이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생애를 한국인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담았더라면 그러한 성과는 거둘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의 폭력성 혹은 암울함을 조명하거나 비판하는데에만 치중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인데, 작가는 결코 인간 앞에 시대를 세우지 않는다. 시대의 부당성과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물을 창조해 '활용'하지 않고 온갖 놀라운 상황들을 견디며 분투해온 사람들의 삶을 존귀하게 써내고 인정하고 긍정하는데 집중한다. 그들이 살아낸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고 저자도 결코 그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다만 차별과 혐오, 상처를 안고 그 시대를 건너온 가족의 위대함, 인류의 위대함, 우리의 위대함을 말하는 데 작가는 방점을 찍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을 중시하는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 강의를 들었을 때와 유사한, 아니 어쩌면 그 훌륭한 강의를 통해서도 충족되지 않았던 어떤 한 부분이 충족되는 느낌을 받았다. 역사와 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역사)의 위대함과 인간의 존엄함, 내가 역사의 일부이며 그래서 결코 역사에 무임승차해선 안 될 소중하고 가치로운 인물임을 느낄 수 있어서 더없이 충만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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