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들을 만나며 만들어진 습관인데,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책에는 밑줄이나 메모를 전혀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넘어져도 상처만 남진 않았다」를 읽으면서도 마음에 남는 구절들은 이렇게 따로 필사했다. 글 전체가 마음에 들면 일일이 필사하는 대신 페이지만 기록해 두었다. 엥간하면 제대로 된 공책에다 제대로 필사하려 했는데 그러다간 정말 책 전체를 베껴쓰게 될 거 같아서 그만뒀다. (그런데 한 번 그렇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 인생 첫 필사본을 물을 때 또 한 번 이 책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저자는 오랫동안 에세이 쓰기를 망설였다고 한다. 워낙 사생활에 민감한 성격이기도 하지만 진정 애도하지 못한 것들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 떠났던 여행에서의 예상치 못한 (그야말로 '선물' 같은) 만남과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접어야 했던 심리학 공부의 시작 등은 그로 하여금 "오늘의 눈물이 내일의 미소로 바뀔 '시간의 마법'"을 믿게 했고, 이제 그는 초라한 자기 내면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넘어 삶에 지쳐 무너지고 있는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 자신의 글을 통해서.
책을 읽는 내내 형언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이 명치 근처를 뻐근하게 짓눌렀다. 육성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어느새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기도 했고, 오늘의 나는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어 그저 열심히 글만 읽어내리기도 했다. 언제나 내 곁을 맴돌던 오만과 열등감의 발견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것 역시 '나'라고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좋은 책이 내게 오는 것만도 고맙지만 그 책을 언제의 내가 만나는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겨우 스물하고도 몇 해만을 살아 온 내가 이 책을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다닐 때의 내게도 분명 이 책은 '좋은 책'이었겠지만, 오늘의 내가 이 책을 보며 생각하고 느낀 것들은 모두 오늘의 나에게만 주어진 선물같이 느껴져서.
언젠가 다시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꺼내 읽게 된다면 그날의 나는 어떤 북리뷰를 남기게 될까. 새로운 영화를 많이 보는 것보다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걸 좋아한다던 저자처럼 나도 좋아하는 이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