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책을 보고 역사를 이해하는 시대가 아니라 TV드라마를 보고 드라마 식 해석으로 역사를 재단하는 시대이다. 《삼국사기》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드라마 〈선덕여왕〉에 열광하고 드라마 작가의 창작을 역사적 실체로 곧바로 받아들인다. 문화콘텐츠, 스토리텔링, 스토리보드 등 우리 시대를 풍미하는 여러 단어들은 서사(敍事)의 창작과 변신만 강요하고 있다. 물론 새로운 서사의 탄생과 재해석은 긴요하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史實)은 또한 사실(事實)일 뿐이다. 제아무리 〈선덕여왕〉이 재미있고 인기를 끈다 한들 역사적 사실은 전혀 다를 수 있다.
김정산의 《삼한지》는 야사 위주의, 그야말로 ‘소설 쓰기’ 풍토에서 벗어나 정사를 과감히 끌어들이고 있다. 작가는 사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사관을 견지한다. ‘외세를 끌어들인 신라의 잘못된 통일’ 식의 담론이 우리 시대의 민족주의적 가치관의 산물임을 꿰뚫고 있다.
작가는 국민 필독서가 된 《삼국지》에 견주어 우리 현실을 주목한다. 국내 유수의 작가들이 저마다 《삼국지》를 경쟁적으로 펴내지만 정작 남의 나라 인물을 통해 꿈과 기개를 키움은 생각할수록 딱한 일이다. 《삼국지》에 쏠리는 독자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야기를 속속 펴내야 하지 않을까. 김정산 작가는 이 점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지’를 다룬 역사소설답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숨 가쁜 시절이기도 했던 100년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가고 있다. 100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그 순간순간들이 10권의 대하에 오롯이 담겨졌다. 삼국의 영웅들은 별처럼 빛나고 난세의 영웅답게 곳곳에서 스러져 갔다. 어떤 영웅은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고 어떤 이는 이름조차 없이 그야말로 ‘무명용사’가 되었다. 작가의 섬세하고 예리한 손을 통하여 시대의 영웅들이 되살아나고, 우리의 고대적 꿈과 기개가 눈앞에 생동감 있게 펼쳐졌다.
책을 잡자마자 술술 읽힌다. 영어식, 한문식, 일어식 문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식’ 문장법이다. 문장에 가락이 녹아 있고, 높낮이와 빠르고 늦음이 문향(文香)의 격을 드높이고 있다.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기개가 넘치면서도 섬세하거나, 세밀하면서도 통 크게 휘몰아친다. 끝없는 전란에 시달리는 민초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돌리면서도 애환을 뛰어넘는 역사적 환희와 동시대인의 당당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삼한지》 10권을 써나가면서 삼국의 가장 절묘했던 순간의 발자취를 달려간 작가의 열정과 노고가 책갈피에 묻어 있다.
작가의 박람강기(博覽强記)와 이를 적절하게 제어하면서 김정산류의 독특한 서사를 완성시켜 나간 근기(根氣)에 경의를 표한다. 내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작가의 내공이 전 10권에 속속들이 숨겨져 있다. 그 내공을 통하여 역사적 인물들과 우리는 속 깊은 대화를 하게 되었다. 감히 일독을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