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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 클로저 - 나를 안전하게 지키면서 세상과 가까워지는 심리 수업
일자 샌드 지음, 곽재은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행복의 조건 중 으뜸은 성숙한 자기보호다.
자기방어를 자기보호로 바꾸면 행복해진다.
컴클로저를 읽으며 아쉬웠던 점
독자들이 기초적으로 알고 읽으면
도움이 될만한 부분인
심리학의 기초, 자기 보호, 자기방어, 페르소나의 시작점을 통으로 잘라 먹었다.
그래서 컴클로저를 읽으면서
자기보호,자기방어의 애매한 부분에
혼동을 가지고 오해하며
읽는 독자분들이 있을까도 싶다.
컴클로저에서 말하는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헬레니즘 철학에 기초 해서 말씀드리고 싶다.
에피쿠로스학파 VS 스토아학파
..그리고 페르소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행복, 쾌락,
그리고 자살을 연상시킨다.
스토아 학파는 '인생은 연극이다.'라고 얘기했다.
(에피쿠로스 학파 관련 내용은
제일 밑으로 쭉 내리심
그들이 말하는 행복, 쾌락,자살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음.)
페르소나? 가면... 누구나 가면은 쓰고 있다.
가면이라고 하니까 어감이 자칫 오해를 살만하다.
나는 페르소나를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판단능력과
대처능력이 토대하여 나온
사회생활의 기초가 되는 도구 정도로 생각한다.
현실과의 타협이라고 해도 될런지도 모른다.
지의 삶, 회사에서, 학생은 학생으로써의 가면.
가정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나름의 가면이 있을 것이다.
나는 페르소나에 대해
크게 부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이 살았지만
살다보니 적당한 자기보호에 대해 필요성을 깨닫고
회사에서의 행동과 집에서의 행동이 다르고
친구들 대하거나 누군가를 대할 때
그들에게 내가 원하는 페르소나를 유도 해내고
서로의 관계를 지속해왔고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역으로 나 또한 눈치껏 그들이 원할만한
페르소나를 찾아냄으로써
보다 친밀하고 원활한 인간관계 구축을 도모해왔다.
너무 계산적일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본인
그대로의 100%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여기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지 헤아려 보았는가.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도
어머니가 바라는 모범적인 딸이라는 모습이 존재한다.
상황에 맞춰 다양한 가면을 바꿔쓰는 모습들 중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 것인가.
페르소나라는 자체는
나에게 남들이 나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이며 방패가 되기도 한다.
에피크로스 적 측면의 쾌락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추구한다는 말이 아닌
행복의 지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 스크롤 제일 밑에 부연 설명)
함께있어 행복하고 즐겁고 유쾌, 상쾌하면
그 사람과 계속 만나고 싶어할 것이고
반대로 누군가의 만남이 불쾌하고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면
만남을 기피하며 그 사람을 피할 것이다.
이런 크로스 적인 우발적인 만남이
에피쿠르스 적인 사람이다.
반면 스토아학파는 매일매일의 순간마다
쪽대본을 받아 삶을 연기 하는
필연적이고 운명에 엮여 살아가다 보니
사람과의 만남 자체가
너는 너의 역할이 있으며
너로 인해 행복해하는
나의 역할이 정해져있고,
나라는 사람은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계관이다.
스토아적인 삶이란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다.
순응, 저항이 없다.
오히려 저항하는 것을 부정한다.
왜 나의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없이 그것이 나의 주어진 인생이라는 것.
그들은 삶을 실타래에 비유한다.
우리는 실타래가 완전히 다 풀리기 전까진 전혀 알 수 없다
그 실타래를 풀다보니 실에 부분부분이 다른 색이었더라.
끊겨있더라.
그것 또한 풀어봐야 아는 것인 것처럼
결정론을 주장한다.
시간의 경과는 실을 푸는 것이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간단 명료한가.
학파내의 주장은 그러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견주어 생각해보면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할 것도 없다.
우리는 사회라는 것을 이루고 사는 구성원들이다.
누구나 그 자리에 있는 나의 역할이라는 것이 있고
나는 그 역할을 충분히 잘 수행해나가고 있다.
전체라는 것과 조화를 이루는 삶.
그것이 스토아 학파의 중심모토이다.
스토아적인 사회에 살다보면
그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들 답답해서 그 탈출구를 찾기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도.
그래서 컴클로저 같은 책을 사서 읽으시는지도?
행복, 쾌락이라는 것을 중시하는
에피쿠르스 학파에게 밤문화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스토아적인 사람들로 인하여 밤문화가 생겨났다.
밤문화에서 쓰고있던 페르소나를 벗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가끔 술에 의존하여 (만화, 게임 등)
페르소나를 벗고자하는 사람들이 종종있다.
컴클로저에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현실에서 에피쿠르스적인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나에게 있는 페르소나는 어떠하며
그것을 쓰고있는 가 벗고 있는가, 들고 있는가.
검점해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이 바로 컴클로저에서
집요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 아닐까?
에피크로스 적으로 한 사회를 이뤄서
유지하기에는 통제되지 않는 요소들에
다소 노출이 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페르소나라는 가드를 올리는 것.
그것이 스토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사회에 구성원으로써
적절한 페르소나는 필요하다는 나의 의견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에피쿠르스적인 삶을 살다가도
스토아적으로 고착되기도 한
어떻게 보면 비범한 에피쿠르스 적 삶을 살고 있다.
보통의 페르소나는 타인으로 하여금
나를 방어하는 역할을 한다.
방어에 주력하다보니
나를 위한 보호가 감금이 될 수 있는 데,
바로 그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이 된다.
페르소나로 인한 자신의 억압으로 인한 정신적 데미지와 자신의 페르소나를 진짜의 나라고 착각을 하거나 구분을 하지 못하는 비극.
컴클로저에서는 바로 이점을 집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자샌드는 알고 있었다,
방어를 하는 페르소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내가 강자의 입장에서 상대방과의 원활한 관계를 위한 성숙한 페르소나,
방어는 하되 적절한 조절의 전략적 페르소나가 있다.
과연 나는 그 페르소나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그리고 컴클로저에서 하고 싶었던 말도 이 말?)
가면을 쓰고 있지는 않지만
그 가면을 항상 손에 쥐고 있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것은 외담이지만,
더 큰 쾌락을 위한 지금의 쾌락을 미루는 정신세계
다이어트를 하면서 힘겨워하지만 우리가 다이어트를 하는 이유.
에피크로스 학파에서 말하는 부분을
좀 더 현실원리에 입각해서 다듬었다고 해야할까.
여성들이 화장을 하는 의미는?
화장이라는 것은 자기를 돌보는 속에서
타인에게 더 좋게 보이게 하려는
스토아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역사적으로 에피크로스 학파가 나온 이후
스토아 학파가 나왔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으신지,
왜 그 자유분방함에 맞선
억압이라는 것이 나오게 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인데
지금 우리는 그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컴클로저를 읽는 내내
너무도 다양한 사례가 오히려 지루함을 가지고 왔다.
집중력을 흐렸다.
그제 아이 양육에 대한
육아서적 포스팅을 올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컴클로저 도처에
양육자로 부터 발생한 문제가
잘못된 자기보호로 정착된 경우
심리상담 또는 개인만의 노력이 아닌
부모와 관계, 가족의 발견 등을 통해
극복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컴클로저 일반적인 사례들은 아닐지도.
컴클로저에서 말하는 양육자 마다의
여러 스타일이 있다는데
이에 따라 자녀가 어떤 성인이 되었는지
다양한 사례가 나오기도 한다.
물론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또, 컴클로저를 읽다 놀란 점은
콩 심은데 콩 난다고 하는 말이
양육자가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잘못된 환경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녀가 되물림 하는 것이
자녀가 성인이 되어서
무의식적으로 찾는 자기보호기재로써
그런 (잘못된)익숙한 환경이
본인에게 대처하기 쉽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갸우뚱. 석연찮은 구석도 있었다.
컴클로저, 부모 핑계대지마
많은 사례들을 읽다보니
왠지 모르게
나는 우리 부모님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나에게 우리 부모님은 최고의 부모님이었는데
컴클로저에 쓰여있는 데로라면
나 또한 내가 모르는 자기방어로 똘똘 뭉친
무의식의 컴클로저 아닐까?
나까지 흔들리다니!!
억울하신 부모님 많으시겠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도 자식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보여주고 싶은 만 있고
어떻게 키우고 싶다라는 마음에
부모님 나름의 페르소나가 존재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에 맞춰 실망시켜드리지 않는
막내 딸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가면을 쓰고 있다.
가끔 그 가면이 벗겨져 살짝 놀라긴 할지언정
어쪄랴?
나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이시고
악의적인 페르소나를 가진 관계가 아니니까,
주변에 자기방어 끝내주는
컴클로저가 있다면?
근데 제 주변에 자기방어 끝내주는
고슴도치 한마리가 있는데
그냥 두는 게 맞겠죠?
그녀는 그냥 스토어 학파의 페르소나임을 떠나
'더 이상 가까이 오지마!!!!'의 외침이
들리는 듯 하거든요.
가까이 가면 화를 내고
멀리하면 마음 편해하는 게 보여요.
그럼, 그녀가 원하는 데로 해야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말자.
컴클로저 외 내용
에피크로스 적 측면의 쾌락이라는 것은
순간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추구한다는 말이 아닌
행복의 지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성욕을 느낀다고 아무에게나 행위를 할 수 없다.
억지로 하게 될 경우 그 순간이 지난 후
그는 과연 행복이 지속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사려가 중요하다고 했다.
욕망을 추구할 때 사려가 없으면 안된다.
그들이 말하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뿌듯하고 행복해하는 나의 쾌감을 위한
나를 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라고 이야기 한다.
그로인해 그 당시 쾌락이라는
전제의 사회구성원들이
조화를 이루며 살수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에피쿠르스가 말하는 자살이라는 것.
통상적으로 보면 자살이라는 것은
회계를 할 시간이 없다.
바로 내 자신이 나를 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지고 더이상 행복을 느낄 수 없고
괴로움이 지속될 거라는 확고함이 있다면
그들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을 한다.
예를 들어 사지가 마비가 되고
정신만 있는 환자가 고통에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며 안락사를 요구하지만
사회에서는
"왜 죽으려고 하느냐 견뎌봐라,
그렇게 죽게 놔둘 수 없다."고 답한다.
이는 에피쿠르스 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보다 잔인한 것은 없다.
스토아적 또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의 생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의 입지가 있는 반면
에피쿠르스 적인 사람에게 나의 생명이란
내가 스스로 거두어 들일 수 있는 것이고
모든 중심은 나의 삶이 된다.
모든 것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내가 죽어서 슬퍼할 타인의 고통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인식한다고 해도 몹시 괴로운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하는 지금 내가 죽으면 그만인 것이지
아픈 건 에피쿠르스 적인 면에서
엄격하게 따지기엔 그들의 입장일 뿐이다.
주변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픔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 자살하려던 사람이 망설이는 것은
아직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를 위해 슬퍼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 삼고 그만큼의 한 가지 희망이 있고
행복이 있다는 것이고 최악의 상황은 아니겠다.
또는 죽음에 대한 공포 앞에서의 변명이며
내가 지금 죽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자기정당화이기도 할 수 있겠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