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 - 어느 속물의 윤리적 모험
박선영 지음 / 스윙밴드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여러 곳에서 울었다.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회를 보고 미래를 보면서 제대로 깨어 있는 상태로 따박따박 써 나간 글들.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박선영 기자는 소리친다. “나는 그저 하나의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은 윤리적이고 싶다.”

 

그렇지. 나도 정확히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본문 앞에 나와 있는 바로 이 두 문장이 박선영 기자를, 그리고 나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글 같아 처음부터 마음이 짠해졌다. 나는 윤리적인 속물이고 싶다. 염치를 아는 욕심쟁이이고 싶다. 이 세상, 이 나라에 가진 자들이 염치가 없어서 없는 자들이 염치를 너무 알아서 문제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1밀리미터의 희망이라도>에는 내가 공감하고 싶은 글들이 너무나도 많다. IT 천재 데미스 하사비스에 대해서는 박선영 기자는 적개심을 느꼈다지만 나는 천재가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드는가? 정말로 천재이기는 한 것인가, 하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 내 안쓰러움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은……,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불리한 방향으로 나가는 것 같지만.

 

대개가 가난한데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야 하는 시대. 청년들은 가난하다면서 왜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고, 패스트패션을 사 입으며, 유명 맛집의 음식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는가.”(20) 분명히 의문문처럼 읽히는 이 문장을 온점으로 끝내면서 풀어내는 박선영 기자의 사유에서는 내가 미처 보지 않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려 하지 않았던 젊은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그와 더불어 의문이 하나 들기는 했지만, 아직 내 자신도 답을 찾지 못한 의문이니, 이 서평에 그 의문을 쓰기보다는 홀로 좀 더 사유해 보려고 한다.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를 묻지 않아야만 보이는 재능들을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 묻느라 놓치는 나라.”(24) , 이런 문장으로 사회에 도끼를 던지는 저자라니. 부럽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 또 공감이었다. 하지만 기레기라는 용어에 반박하는 부분은, 나로서는 찬성해 줄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기레기에 대한 변명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시민은 기자와 기레기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기레기라는 표현은 시민이 나쁜 기자들에게 던지는 비판이다. 기레기를 왜 비난으로만 받는가?

 

박선영 기자는 어떤 비판을 비판할 수는 있어도 비난하고 응징하며 비판하지 말 것을 명할 수는 없다.”(121)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 시민도 기자를 비판할 수 있다. 우리 시민은 모든 기자에게 기레기라고 하지는 않는다. 언론이 이명박근혜 정권을 만드는데 기여했다면 바로 그 언론이 촛불혁명을 일으키는 데도 기여했다.

 

우리 시민은 소통하지 않고 우리의 귀와 눈을 가리기에 급급했던 쓰레기 언론을 기레기라고 하는 것이다. 언론인도 기레기라는 용어가 비난이라고 슬퍼하면 안 된다. 기레기라는 용어에 변명만 하고 있으면 안 된다. 기레기를 속아내고 정당하고 공명한 언론을 만드는 데 기자가 앞장서야 한다.

 

나에게 박선영 기자는 기자이다. 그런 기자 분들이 앞장 서 주시기를. 30년 동안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경향일보, 한겨레신문, 시사인 순으로 구독하는 일간지와 월간지를 차례차례 절독하고,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길을 잃은 나 같은 시민에게 밝은 길을 보여주시기를.

 

여러 가지 불만이 있지만 그래도 네이버 맨 앞에 한국일보 하나 남겨둔 나 같은 시민에게 희망을 주시기를(한국일보를 나두려고 생각한 건 아닌데, 적어도 하나는 남겨야 한다는 네이버 원칙 때문에 고민하고 택한 언론이다). 몇 년 동안 기자보다도 정치인들이 훨씬 거한 쓰레기였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아름답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이 탄생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애쓰고 있는가. 기자들의 세계에서도 멋진 스타 기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시민이 기자를 보는 관점을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지는, 사실 전혀 다른 주제, 전혀 다른 맥락에서 나온 글이지만 박선영 기자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내로남불 논란이 지식인 그룹에서 자주 터지는 이유는 세상 모든 일을 전지적 논평자 시점으로 서술하는 이들의 직업적 관습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실천보다는 이론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은 계몽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이론이야말로 최고의 실천임을 믿고 스스로를 종종 구조 바깥에 위치 지운다.”(178)

 

이제는 아마도 박선영이라는 이름이 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됐으리라고 생각한다. 멋진 글과 멋진 생각을 쓸 수 있고 사유할 수 있는 사람. 내 딸에게 들려줄 수 있는 멋진 페미니스트, 내 아들에게 읽혀줘야 할 건전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이자 작가. 아이들과 남편에게 이 책은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읽히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며느리의 관점에서 엄청나게 공감했던 문장들.

 

세계가 달라진 게 아니었다는 인지의 충격은 결혼과 함께 가정이라는 제도 속에 새로이 편입되면서 마침내 발생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딸은 21세기 식으로 아들은 19세기 식으로 키운 탓이다. 20세기의 연인들이 결혼과 동시에 19세기의 남편과 21세기의 아내로 결별해 불화하고 최후의 문화지체 속에서 이 땅의 아내와 며느리 들은 수시로 타임 슬립을 겪는다……. 제사와 명절만이 아니다……. 미래에서 온 나만 홀로 고독했을 뿐이다……. 기쁘게도, 슬프게도, 여성은 이제 거의 모든 것에서 해방됐다. 여자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은 더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와 며느리라는 제도에서는 해방되지 못했다……. 명절증후군은 단지 1년에 한 두 번 과도한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의 고충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가정에서의 여성 착취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제의에 대한 여성들의 신체적 거부반응을 뜻한다……. 명절 하루 일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속 좁게 구는 거야?'처럼 멍청한 소리도 없다……. 문제는 노동의 강도가 아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도무지 찾아지지 않는 노동의 합목적성이 비극의 원인이다. '내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이었으며, 기일이 언제였던가'하는 물음이 왜 남편의 증조할아버지 제사 때만 떠오르는 것이냐 말이다. 왜 김씨 조상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부엌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이씨와 박씨와 최씨와 강씨뿐이냐는 얘기다…….제사 때문에 일찍 퇴근하겠다고 했을 때 회사의 남자 선배가 말했다. "쟤는 회사에서만 열혈 페미니스트지 시댁에서는 효부 중의 효부야. 열녀문 세워줘야 해." 그날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나보다 늦게 퇴근해 제사 직전에야 도착했다……. 그렇게 울부짖어도 이러고 사는구나, 사랑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19세기로 기어이 되돌아가는구나, 자기혐오와 환멸을 떨치기 어렵다.”(200~203)

 

늘 불만을 터트리면서도 바꿀 용기 하나 대들 용기 하나 없다는 자괴감으로 끝나고, 그 자괴감을 안고 타인의 비난과 조롱까지 받는 슬픔은 이 땅의 많은 며느리들이 느낄 것이다. 이 싸움은 시가집과 며느리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바깥일을 하는 며느리와 바깥일을 하지 않는 며느리들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박선영 기자의 말처럼 XX끼리는 협력하고 XY하고는 싸울 문제가 아니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가 억압적인 제도와 전통과 싸워야 하는 문제이다. , 늘 말은 많은데 실천이 없는 나의 페미니즘이라니. 난 적어도 20세기 중후반 사람은 되는 XX일 텐데, 고민거리가 많아졌다. 고민을 많이 주는 책은 좋은 책이다. 박선영 기자의 글을 모두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