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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더 잘 보이는 미술관 이야기
이소영 지음 / 모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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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 서울 DDP 디자인 둘레길(533m)에서 열린 전시회 하나가 화제였다. ‘누워서 보는 전시회’. 제목도 ‘백두대간 와유(臥遊)전’.

총 길이 150m에 달하는 큰 그림을 감상할 방법은 여러 가지. 지나치거나 멈추거나 걸어가거나. 그중에 눈에 띈 것은 관람객 편의를 위해 편안한 자리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 씨가 우리나라 산과 계곡을 본떠 만든 구릉 모양 의자 자리를 곳곳에 비치해 와유(臥遊) 관람이 가능토록 했다.

1925년 문을 연 서울역, 지금 대합실 모습은 어떨까?
2011년, 복합문화공간 ‘문화역 서울 284’로 변신했다. 그간 이곳에선 여러 전시회가 많이 열렸다. 이달 25일까지 ‘2024 전통 생활 문화축제 오늘 전통’전이 열린다. 오래전 살림살이 집과 전통 놀이에 관한 아기자기함이 그 시대를 따라가게 만드는 정감 있는 시간이다.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장소는 상황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지만 재창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르세 미술관은 옛날 기차역이었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원래 궁(宮)이었다. 심지어 테이트 미술관은 감옥이었다.

미술 역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이소영 작가가 쓴 ‘그림이 더 잘 보이는 미술관 이야기’에 비슷한 내용이 등장해서 위 두 가지 장면을 예로 들었다.

이 책은 목차만 읽어도 우리가 그간 궁금해했던 미술관(전시관, 갤러리, 뮤지엄, 박물관 등 어떻게 불러도 좋다)에 관한 자잘한 듯 보여도 매우 유용한 내용이 그 시대 역사와 함께 버무려져 맛깔나게 설명되어 있다.

작품 걸기 높이, 관람 시간, 방법, 전시 환경, 보존, 청소, 재난 대비, 수장고, 굿즈 판매장, 카페 등 아리송하지만 쑥스러워 접어둔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 ‘세상에 없던 미술관 이야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첫 페이지부터 읽을 필요 없다. 시쳇말로 구미 ‘땡기는’ 장면을 먼저 찾아가도 된다.

이를테면 이렇다. 작가가 직접 그린 책 홍보 표지에 그린 그림을 보면 미드, ‘가십 걸’에 나오는 금수저 일당들이 요거트를 먹으며 폼잡는 장면이 나온다. 그곳이 바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구 계단이다.

여기서 ‘계단’을 관심 있게 봐야 한다. 넘어지면 다친다는 주의 사항이 아니라 원래 계단은 권력 상징이다. 청와대 본관 내부 계단도 그렇지 않던가? 은근한 과시다. 작가는 영악하게 이렇게 독자들을 유도해 미술관으로 자연스럽게 입장시킨다.

영화관, 서점, 음반 가게는 쇠퇴 혹은 내리막길인데 유독 미술관은 왜 호황일까? 본점 인기를 넘어 분점도 여러 곳에 두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소문관, 북서울관, 남서울관이 있고 심지어 서울시립미술관 아카이브 ‘세마’ 창고도 있다. 국내뿐 아니다. 루브르미술관은 두바이 아부다비에도 있고, 구겐하임 미술관은 스페인 빌바오에도 있다. 또 얼마나 많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나?. 아트페어는 정신없을 정도로 많다.

이제 전시장에 걸린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그때는 어땠고 지금은 어떠한가?
얼마 전 사진가 P와 나눈 이야기. 전시장은 훌륭한데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빛과 액자 처리가 잘못돼 작품이 반사돼 감상이 어려웠다고 호소했다. 해당 작가는 아마추어도 아니고 프로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일은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 빛이 살리는 작품이 있고 죽이는 경우도 있다. 요즘 전시장은 대부분 ‘화이트 큐브’를 선호한다. 형식 없는 흰 벽과 무채색 바닥으로 이뤄진 사각형 전시 공간을 일컫는다.

그럼 작품 감상에 적절한 높이는? 17, 8세기 프랑스 영국 왕립 미술 아카데미 전시회 풍경을 보면 너무 높이 걸려 있다. 배경도 화려하다.
도무지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구조. 목이 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랄까? 가장 좋은 높이는 눈높이 언저리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쳐다보는’에서 ‘걸어 다니며’ 보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었다. 물론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심지어 작품 설치위원회까지 있었다잖아.
작품 한 점을 보는 시간도 연구한 바 있다. 결론은 ‘지 맘대로’다. 심지어 뛰어가며 본 사람도 있다. (물론 영화에서지만- 장 뤽 고다르, ‘국외자들’, 1964)

지난해 국립진주박물관을 방문한 적 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알찬 전시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진주라는 역사성에 깔맞춤했다.
전시장을 빠져나오자마자 맞닥뜨린 곳이 아트숍이었다.
거기서 나전 칠함을 본뜬 필통과 임진왜란을 서술한 오희문 ‘난중일기’도 구입했다.

1920년대에 벌써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는 복제 엽서와 포스터를 판매하는 매장이 있었다. 요즘 미술관에는 카페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도 많다. 미술관 옆에 동물원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실제 미술관과 동물원이 같이 있는 곳은 과천 서울대공원‧국립현대미술관. 바로 옆엔 서울랜드가 있으며 동물원이 존재한다. 이성재, 심은하 주연, ‘동물원 옆 미술관’ 영화 배경이 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소영 작가는 과학의 눈으로 미술을 읽고(‘실험실의 명화’), 화가 도구와 기술 중심으로 그림을 이해하는(‘화가는 무엇으로 그리는가’) 사람이다. 현재 수원에서 책방, ‘마그앤그래’를 운영하고 있다. 다음 그녀 책은 무엇이 될지 가늠해 본다. 더 재미있고 유익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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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대한민국 도슨트 13
이지상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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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나의 늙은 애인 같은’
포천/ 이지상

그 사람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노랫소리가 들리고 떠도는 영혼이 보이고 장차 닿게 될 어느 장소를 만나게 된다.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덕산기에 있는 ‘숲속 책방’에(아, 강기희 작가도 본향으로 떠났구나) 걸려 있는 최광임 시인 시, ‘덕산기에서’를 제목을 바꿔 노래로 만든 이이기도 하다.
‘나의 늙은 애인아/ 볕 좋은 마루 위 고양이처럼/ 순하게 늙어가자/ 나의 늙은 애인아 아직 오지 않은/ 나의 늙은 애인아/ 느릿느릿 흐르는 강물처럼/ 천천히 늙어가자 애인아.’
이 노래에서 언급된 ‘애인’을 ‘고향’으로 변주(變奏)해 읽었다. 싱어송 라이터 가수, 여행가, 사진가 등 이름표를 많이 달고 있는 이지상 작가가 이번에는 스스로 대한민국 도슨트가 되어 쓴 고향이 이야기, 포천(抱川).
이 책은 그 동네가 낯선 이에게 내미는 따뜻하고 친밀한 여행기다. 맛집, 포토존, 눈요깃거리 중심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이 경험한 일을 자세하게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시베리아 등 밖으로 떠돌던 그가 이제 ‘물이 흐르는 마을’을 안고 나타났다. ‘적당한 갈망, 지나친 낙관’을 일상으로 여기는 사람다운 내용이다.
책이 나온 후 그는 어머니 산소를 찾아 헌정(獻呈)했다. ‘포천 촌놈 내 아들, 이만허믄 잘했다’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알려왔다. 읽는 내내 유독 고향에 관한 노래를 많이 부른 가수 김상진 씨 ‘고향이 좋아’가 뜬금없이 떠올랐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타향도 정을 두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바보처럼 바보처럼/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님 생각 고향 생각 달래려고 하는 말이야/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개성 인삼은 잘 알아도 포천 인삼이 유명하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개성에서 삼 농사를 더 이상 지을 수 없게 되자 삼 종자를 가지고 와 이곳에서 성공을 거둔다. 품질은 최상, 경기도 인삼 생산량 15%를 차지하고 있다.
포천 막걸리, 이동 갈비 등은 포천을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 모두 군대(군인)와 관련이 있다. 막걸리를 유독 좋아했던 연산군이 시를 지을 정도였다. ‘참새는 가지를 다투다가/ 떨어지고/ 나는 벌레도 정원에 가득히 노닐고 있네// 막걸리야/ 너를 누가 만들었느냐/ 한잔으로 천 가지 근심을/ 잊어버리네’ <1504년 1월, ‘연산군 일기’>
포천은 한국전쟁 최초 격전지였고 지금도 경계선이 여전하다. 그래서일까? 글 군데군데 전쟁 상흔이 남아있지만 ‘칼의 반대말은 방패가 아니다. 모든 전쟁은 꽃으로만 가능하다. 꽃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어떤 싸움도 불가하다.’고 잘라 말한다. 한탄강 꽃 정원, 방어 벙커, 3‧8선 휴게소 등을 소개하면서도 이 점을 강조한다. 뱅크시 작품, ‘꽃을 던지는 사람’과 이미지가 자연스레 겹친다.
그가 제일 아끼는 장소라는 산정호수. 물안개를 만난 날이면 더 가슴을 후비 파는 아픔이 솟는다. 개그 소재로 전락하고 폭군으로만 기억하는 궁예 눈물을 ‘멍에’로 재해석해낸다. 고모리 호수공원 축제의 장에 있는 ‘김종삼 시비(詩碑)’도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다. 김 시인은 황해도 은율이 고향이지만 이런저런 사연에 얽히고설킨 끝에 이곳에 정착했다. 풀피리 불던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한탄강 변에 있는 ‘오세철 풀피리 전수관’을 들러보는 것도 좋겠고 ‘무예도보통지’를 지은 저술가인 무사 백동수를 만나고 싶다면 무란 마을에 들면 되겠다.
필자가 가보고 싶은 한 곳이 있다. 문학 서점, ‘무아의 계절’. 근처 프로방스 마을도 있다니 산책길에 만나는 작은 기쁨이겠다. 책방 주인은 바이올렛(연두)을 사랑하는 이다. 이곳에 가면 자신 존재조차 잊어버리는 무아(無我) 지경을 경험할지도 모르겠다.
길 위 사람이 남긴 말, ‘타인의 가슴을 내 가슴에 이식시키거나 타인의 발걸음을 내 발로 옮겨 보는 일, 그것이 일탈이라면 모든 일탈은 성찰에 가깝다.’<이지상, ‘스파시바, 시베리아’ 머리말 중에서>
왜 그리운 것들은 발자국 뒤편을 서성거리는지 궁금한 이는 이제 떠날 시간이 마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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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버스는 착하다
이철 지음 / 학이사어린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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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히지 않는 ‘그때’를 생각한다
시골 버스는 착하다/ 이철

4년 전이다. 그 시인과 시편을 만난 일이. 첫 시집을 상재(上梓)했노라며 부끄러운 듯 보내왔다. 하지만 솔직히 그가 부러웠다. 이렇게 절절한 생애 궤적을 그릴 줄 아는 시인이라니. 그때 받은 감동은 오래 남아 있다. 때때로 그 시편들을 뒤적이며 울음 속에 갇힌 울림을 들었다. 제초제를 마시고 생을 마감한 아버지를 뒷산 살구나무 아래 묻고 돌아온 가족이 모여 말없이 한 끼를 나눈다.
‘찬이라곤 개다리소반 식은밥 곁에/ 돈다발처럼 포개진 삭은 콩잎/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술을 대면/ 가만히 몸을 누이던/ 단풍 콩잎 가족’ <‘단풍 콩잎 가족’ 부분>
세상에 돈다발처럼 포개진 삭은 콩잎이라니. 아버지 힘겨웠던 평생을 이렇게 한 장면으로 슬픔을 옭아매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철 시인이 이번에는 동시집을 출간했다. ‘시골 버스는 착하다.’ 온몸으로 쓰고 영혼을 갈아 넣었다는 표현은 헛말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기쁨보다 슬픔 쪽에 더 가깝지만 감싸 안는 따뜻함 때문에 다행히 눈물이 그렁그렁 괴는 선에서 멈췄다.
동시나 동화는 착한 사람이 써야 맞다. 착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라는 말은 아니다. 어린이 세계도 어른 못지않게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깊이가 있다. 그런 지점을 잘 꿰뚫어 본 시선은 매우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동시 몇 편을 연이어 읽어본다.

‘할머니는/ 여름방학 때마다// “올해는 멧돼지 몰래 고구마를 심었당께”// 멧돼지야,/ 이번 한 번만/ 우리 할머니 얘기 못 들은 걸로 해 줄래?’ <지리산 멧돼지에게‘ 전부>
사람이나 짐승이나 먹고사는 일이 참 고달프지만 이런 씨알도 안 먹힐 부탁을 하는 아이 심정이 고스란히 나타나 슬며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버지는 지난여름/ 언덕길을 오르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만// 그날도 달이 뜰 때까지/ 말똥 굴리는 법을 가르쳐 주셨어요// 사람들이 코를 막고 지나가도/ 절대 기죽지 말라고// 보름달 아래/ 어깨를 펴고/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라고’ <‘말똥구리네 가훈’ 전부>
언제나 식구들 뒷줄에 계셔 존재감도 흐릿한 아버지도 명언을 남기고 돌아가시는 법. 생각해보면 그 무거운 뒷모습이 우리를 살린 게 아니었나.

‘할머니는 그냥 할머닌 줄 알았다/ 용돈 주고/ 머리 쓰다듬어주는// 할머니는 어머니의 어머니인 줄만 알았다// 비녀 꽂고/ 지팡이 짚는// 할머니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서 처음 알았다// 故 정막순 님(여, 92세)’ <‘정막순’ 전부>
그랬다. 할머니 이름은 알지 못했다. 늘 챙겨주시던 꼬부랑 할매. 슬픔이 해일(海溢)처럼 밀려온다. 이름을 불러주자. 마지막에 알아채는 불효 없도록.

‘어디서 낑낑대는 소리 들리면/ 잠 못 드는 사람이 있다// 쓰레기장이든 하수구든/ 집 잃은 소리 찾아/ 밥 찾아 챙겨주고/ 라면 박스에 이불솜 깔아주고서야/ 잠드는 사람이 있다// 엄마보다 열여섯 살 적은/ 누나보다 일곱 살 많은/ 외할머니가 웬수 웬수 하는/ 막내 이모 <‘막내 이모’ 전부>
“지 앞가림이나 잘할 것이지” 하는 꾸지람 소리를 들린다. 막내 이모는 그런 사람으로 종종 구박받았나 보다. 하지만 저런 마음씨는 쉬 흉내 낼 수 없다.

시는 자백이고 고백이다. 아무도 그에게 ‘불어라, 바른대로 말해라’고 다그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비켜설 수 없게 만드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나도 놓칠 수 없다. 아니, 놓치기 싫다. 한 편을 넘기면 또 한 편이 끌고 오는 행과 연은 아프다 못해 저리다.
유난히 가족 서사가 많다. 그때 불러내지 못한 이름을 이제야 풀어놓는다. 아버지, 어머니, 이모, 이웃, 꽃, 키우던 동물까지 죄다 소집해 애정을 표현한다.
과거 이야기가 태반이지만 지나간 것을 시쳇말로 패스(pass)하지 않고 독자에게 다시 토스(toss)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분명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고 잊히지 않는 ‘그때’가 남아 있으니깐.
작가는 동시집에 그림이 없어서 읽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한편 한편 읽어 갈수록 그림이 그려지는 마술 같은 일이 눈 앞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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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이 공간을 유지할 운명이었나 봐요
채도운 지음 / 지베르니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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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또 희망을 발견해 버렸네
나는 계속 이 공간을 유지할 운명이었나 봐요/ 채도운

‘분명히 내 것이었는 줄 알았는데 다 ‘기프트’였어. 내가 벌어서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었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 <이어령, ‘마지막 수업’ 중에서> ‘시련은 단련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고 하는 말은 어쩌면 가혹한 언어 수사(修辭)일 수 있다. 당해보지 않고서는 절대 모를 일이다. 오히려 고통을 당한 사람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각오를 다지는 편이 더 낫다.
카페 창업기를 브런치에 연재하다가 책을 출간하는 ‘선물’을 받은 사람. 채도운 작가는 2018년부터 경남 진주 문산읍에서 카페인지 서점인지 가늠하기 힘든, 애매하지만 ‘아무튼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병(bottle)에 담긴 음료와 책(book)을 결합한 북카페, ‘보틀 북스’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해 11월, ‘진주 청년 플랫폼’을 통해 생생하게 소개된 바 있다. 물론 작가로서도 인정을 확실하게 받게 된 계기였다.
에세이집, ‘나는 계속 이 공간을 유지할 운명이었나 봐요’는 2021년 11월 발간한 첫 책, ‘엄마는 카페에 때수건을 팔라고 하셨어’ 속편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고 성공담이 아니다. 생애 첫 책, 마지막 부분에 써둔 글, “아직도 나는 열심히 달리는 중이다. 앞, 뒤의 경쟁자를 의식하며 열심히 살고있는 중이다. 나는 아직도 애매하게 중간을 달리는 중이다. 그것도 즐겁게! 즐겁게 달리는 중이다.”라는 말처럼 아직 마라톤은 끝나지 않았고 결승점도 아득하다.
엄청난 수익은 커녕 사람 사이에서 자주 좌절하고 생계는 늘 아슬아슬 하지만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매일 행복한 시시포스’를 꿈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헛된 일장춘몽이 아니라 ‘될 때까지’ 해 보는 ‘꾸역’ 정신이 장착되어 있어서다.
처음에는 주력 상품으로 커피를 선택했지만 어디 카페가 그곳뿐인가? 답답하고 한심한 나날은 손님 기다리는 일로 점점 무력감에 빠져들게 했다. 기다림에 지쳐 선택한 일이 ‘책’이다. 지금은 독서 모임 회원만 200명이 넘는다. 책방지기는 당연하고 문화 기획자, 강연가,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적자 인생이다. 책은 생활필수품이 아니라 선택 혹은 간택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내려놓으면 편한데 왜 굳이 험난한 길을 가려 하는가? 그녀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운명’임을. 우직함을 무기로 삼고 전진한다. 스스로 ‘애매한 인간’으로 부른다. 그만큼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러봤다는 말이 분명하다. 결단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열심이란 말을 대변하는 겸손이다.
이번 책에서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풀어 놓았다. 전편에서 부모 관련 에피소드가 많았다면 이제 남편과 아직 어린 아들에 대해서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막막’과 ‘먹먹’은 같은 말이다. 그 사이를 건너는 방법은 서로에게 기댐이다. 가장 힘든 가장(家長)은 지킴이 역할을 하고 쪼꼬미 아들은 엄마를 곧잘 돕는 ‘알바’도 서슴지 않고 한다. 아내는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울타리를 자처한다. 그렇게 가족은 세파를 헤쳐나가는 중이다.
종종 자영업자 커뮤니티도 살펴본다. 슬픔, 기쁨, 화남, 환멸 등이 교차하지만 소중한 정보는 꼭 챙긴다. 서로를 위로하는 일, 얼마나 아름다운 나눔인가? 또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의미 있는 일에는 함께한다. 회원들과 곳곳 쓰레기 수거는 물론이고 컵 받침대, 캐리어 재활용 캠페인도 앞장서서 벌인다. ‘나’에서 ‘너’로 마침내 ‘우리’를 발견한다. 영혼을 갈아 넣어서라도 해야 할 일은 반드시 마침표를 찍어낸다.
리즈 마빈이 쓴 ‘나무처럼 살아간다’에 소개된 듬직한 구아레아 나무. 열대 폭풍 앞에서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자기를 보호하기 힘들다는 말이지만 쓰러져 가로로 누운 나무는 그냥 죽지 않는다. 새싹은 다시 뿌리를 내리고 홀로 선다. ‘전사(戰士)의 나무’라고도 불린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흉터가 되라/ 어떤 살아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때때로 ‘현타’가 오면 아들이 장난감에서 빼낸 AAA 배터리 두 개를 손에 꼭 쥔다. 그녀는 말한다. ‘반숙이든 완숙이든 좀 더 단단해질 거예요’. 최근 출판사도 등록했다. ‘삶의 직조’. 이 얼마나 적절한 네이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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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큐레이터 표류기
신용철 지음 / 베리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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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영화 ‘김 씨 표류기’를 생각나게 한다.
신용철, ‘시골 큐레이터 표류기’.
미술평론을 아주 쉽게, 깊게, 넓게 하는 이다.
지인들은 그를 ‘신큐’라 부른다.

‘시 쓰는 로커’가 되고 싶었으나
(그는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다)
민속학자 김열규 선생 가르침에 빠졌다.
’우물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는
선생이 던진 화두(話頭)가 삶을 지배했다.

민속학, 신화학, 미학 등 미로를 헤매며
새로 갈고 닦으며 새길을 내는 전문가다.

현재 부산 민주공원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천여 점이 넘는 그림을 간직하고 있는 곳에서
’그림 목숨‘(畫命)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큐레이터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할을 한다.
스스로 ’시골 큐레이터‘라 일컫는 이유는
겸손이나 자격지심이 아니라 ’평평‘이다.

서울도 시골이고 부산도 시골이다.
중앙과 지역을 편 가르는 시대에 ’칼침‘이다.

그는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를 중시한다.
그가 전해주는 사람과 작품은 모두 그러하다.
살림과 삶 중심에 놓인 민중이 대부분이다.

부산민예총 잡지, ’함께 가는 예술인‘ 등에 실은
글을 간추리고 솎아서 멋지게 한 상 차렸다.

신큐 글은 오미자(五味子)다.
짜고 맵고 시고 쓰고 달다.

반가운 이름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정봉진, 배성희, 윤은숙, 김근숙, 홍성담,
이선경, 박경호, 이인철, 박불똥, 오치근 등등
’설치류‘도 등장한다.

표지 그림은 김경화 씨가 맡았다.
한복 천에 재봉틀 바느질을 한 작품,
’오늘 하루는 열사가 살고 싶었던 내일’.

출판사 ‘베리테’, 책 만드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이 책을 쓰고 만든 이 모두에게 고마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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