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종말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3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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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작가의 신작 <작은 종말> 가제본으로

<지향>, <무르무란>, <개벽> 총 세 작품을

먼저 만나볼 수 있었다


어떤 서평단이든 당첨되면 기쁘기 그지 없지만

가제본 서평단은 도서 제작에 직결된 사람들을 제외하면

독자 중에서는 가장 먼저 작품을 만나보는 것과 다름 없어

더욱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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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롭게 만난 작품들은

꽤나 묵직한 주제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모두 강렬한 감각을 전해줬다


작은 종말을 여는 첫 번째 작품인 <지향>은

거의 매 장을 접어뒀을 정도로 인상 깊은 구절이 넘쳐나는

고여있던 생각의 웅덩이에 풍덩 돌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무르무란>은 인물들의 인디언식 작명과 삶의 방식으로 미루어봤을 때

자연과 더불어사는 모계사회 원시 부족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는데

묘사가 너무나 강렬해서 읽는 내내 꼭 내가 부족의 일원이 된 듯했다


마지막으로 <개벽>은 외계인 창조주를 믿으며

숯과 소금을 비싸게 팔아먹는 사이비가 나오는 블랙코미디인데

일전에 다른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반가웠다


한참 사이비 관련으로 나라가 떠들썩한 어느 시점에 봤던 단편이라

더더욱 와닿았던 내용이고 주제가 다른 앤솔로지에 실렸던 만큼

비교적 키치하며 풍자적 요소도 담겨 있어 보다 가볍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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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를 살펴보니 가제본으로 공개된 분량의 바로 다음 챕터가 표제작이던데

과연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이번 보라월드도 기대만발이다


실망하고 싶지 않기에 여간해선 매사에 기대를 안 하며 살지만

보라월드라면 마음 놓고 기대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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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모집 이벤트에 선정되어 퍼플레인 출판사로부터 도서 일부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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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의 애인이 아니다. ‘친구‘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폭넓은 의미들을 전부 감싸고 있어 매우 모호하다.


혈연이 아닌 타인과 공유한 깊고도 단단한 결속을 이르는 용어가 대부분 성애를 허용했는지 여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조금 소름 끼치는 일이다.

자신들이 잘 모르고 알고 싶지 않은 일은 전부 죄악이라 외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무성애는 이 모든 유성애 중심주의적 방향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 이탈은 자유일 수도 있고 광막한 황무지일 수도 있으므로 자유와 폐허 사이의 모든 상태를 포함할 것이다. 유성애자든 무성애자든 삶이 본래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나 어느 한 가지 상태로 고정되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인간이 겪었고 겪고 있는 신체와 정신의 위협을 내가 완전히 똑같이 경험하지 않았다 해서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공감하고 연대하기 위해 완전히 같은 지향이나 완전히 같은 경험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호리호리하고 단단하고 인정사정없이 아름답고 사나웠다.


‘보통‘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별 이분법에 의거한 성역할이란 납작하기 짝이 없다

무성애는 해탈한 돌덩이가 아니다. 무성애는 다이내믹하다.

비성소수자는 자신이 세상의 표준인 데 지나치게 익숙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존재의 상태가 세상에 다양하고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기도 한다.

친구, 이웃, 동료, 동지가 장례를 치러줄 수 없는 이유는 재산의 처분과 부의금의 모금 및 사용 때문일 것이다. 가족 안에서 돈 문제로 싸움이 나면 ‘집안 문제‘로 취급하여 장례업체도 사법부도 손 떼고 방임할 수 있다. 혈연관계도 혼인관계도 없는 타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법이 개입해야 한다. 골치 아픈 것이다. 친구와 동료가 있고 인간관계를 맺고 넓고 깊고 풍성하게 인간의 삶을 살아온 존재를 무연고자로 만드는 편이 법과 행정의 관점에서 처리하기에 쉽고 편한 것이다.

강이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은 지속하지 않고 미래가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 궁극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약속도 가질 수 없는 모든 존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엄할 수 있기를 나는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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