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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관들에게
연마노 지음 / 황금가지 / 2024년 3월
평점 :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또 가져야만 하는 현대의 이슈들을 종합해서 담아둔 것 같은 단편선 <떠나가는 관들에게>를 완독했다
혹자는 SF라고 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허무맹랑 판타지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요즘의 한국 SF 소설들은 이렇게 우리가 발붙여 지내고 있는 현실에서 멀지 않은 주제에 충분히 공감 가능한 배경과 캐릭터들이 등장해 진입장벽이랄 게 많이 없어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외면하고 있던 일들이나 그간 영화 드라마 같은 매체에서 자주 접해 익숙한 소재
그리고 생각도 못 했던 지점에서 머리를 띵하게 만들기까지
8편의 이야기 모두 우리 외면과 내면에 대해서 곱씹어 생각할거리를 던져주는데 한없이 무겁지도 그렇다고 붕붕 뜨게 가볍지도 않아 그 적당한 무게감이 참 좋았다
이 정도 무게감이면 읽는 사람들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면서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느끼는 바는 명확하다는 점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주제를 다루는 무게감에 이어 던지는 메세지의 톤과 등징인물들 또한 좋았던 게 지금보다 더 생태계가 파괴된 시점의 미래, 이별, 불치병, 멸종, 반복되고 정해진 실패 등등...
좋게 보려고 애를 써도 도저히 좋게 볼 수 없는 키워드들이 즐비해 있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마냥 비현실적으로 무한긍정을 발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염없이 가라앉아 처지를 비관하고만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렇게 하는 힘의 원천이 바로 실낱같은 희망 한 줄기였다는 점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그 희망의 메세지는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고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다가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마지막에 열린 결말로 마무리가 되는데 열린 방향이 충분히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향이라 되짚어 보면서 인위적이지 않게 자연스러운 희망의 메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열린 결말인 만큼 새드 엔딩을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수록 더더욱 환경보호에 힘을 쏟으면 돼...🥹
뒷부분에 실린 브릿지 서평 두 편도 참 좋았는데 나도 저렇게 말끔하고 멋진 서평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찬찬히 읽으면서 고무되는 시간이었다
완급조절에 박수를 주고 싶은 이번 소설도 언제나 그랬듯 발췌로 감상평을 마무리해본다 길이상 더 담지 못해 아쉬울 정도로 현시점에 가슴 깊게 와닿는 구절들이 많았다
나도 멀리까지 나가보고 싶었어. 아주 멀리까지. 닿지 않을 곳까지.
어리니까 더더욱 해야지 하는 말들과 불과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너는 그런 걸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다던 말들.
생각해 왔고 해볼까 했던 것들은 다시 만져보면 질감도 색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덩어리가 되었다.
수천수만 갈래의 가능성과 분기점 중 우리가 들어서 버린 길은 여기였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죽을 수도 없었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 추측하기란 너무나 쉽고, 우리가 선택해서 도착한 길보다 가보지 못한 길이 더 빛나 보이 기 때문에.
도도새, 회색 늑대, 큰바다쇠오리, 보석달팽이, 검은코뿔소, 양쯔강 돌고래, 핀타섬땅거북, 그레이트 리프의 대산호들...... 그들의 대부분이 우리 덕에 살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우리라고 그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을까?
우리에게 우리를 보존하고 우리의 존재를 사라지지 않게 할 권리가 있을까?
원래 누구나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멍청한 선택을 하는 법이다. 그럼으로써 삶을 유지할 수 있다면 더더욱.
왜 모두의 업보인데 터전을 버려야 하는 것은 어떤 누군가에게만 생기는 일인 걸까? 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을까? 왜 이산화탄소 기준치를 어겼다던 공장들이 잠기는 게 아니고, 누군가가 살던 마을이 잠기는 걸까?
찰나를 연이어 순간으로 만들고 순간을 연이어 삶으로 만들 면서 있는 힘껏 존재하는 것.
안녕. 곧 다시 만납시다. 언젠가 어느 찰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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