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끝 NCS 기본서 : 독학으로 끝내는 공기업 NCS 통합기본서 (PSAT형+모듈형+피듈형) - 전2권 - 한국전력공사·한국철도공사·한국도로공사·한국가스공사·수자원공사·한국수력원자력·국민건강보험공단·근로복지공단·국민연금공단·인천국제공항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농어촌공사·한국관광공사·한국공항공사·한국남동발전·한국중부발전·지역난방공사·서울교통공사·부산교통공사 독학으로 끝내는 시리즈
길잡이연구소.애드투북스 지음 / 애드투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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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와 분량 모두 너무 쉽거나 어렵지 않으며 2주에서 3주 정도 학습하기 적절한 분량인 것 같습니다. PSAT 기출을 변형한 것이 많으며 다양한 유형의 문제를 접하기에 좋은 것 같습니다. 복습이나 연습 교재로 좋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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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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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화점 도달

 

 영국 정부는 각종 비용을 대기 위해 아시아 동인도회사 또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과세할 있었다. 인지조례로 홍역을 겪었음에도 심각한 고민없이 후자로 결정되었다. 2 피트 내각의 재무장관이었던 찰스 톤젠드의 추진으로 톤젠드법이 통과되었다. 톤젠드법은 관세법, 세입법, 정지법 등을 포함하는데, 내용은 뉴욕의회의 법안제정권 박탈, 수입품 과세 등이었다.

 이미 아메리카 식민지는 신민의 동의없는 모든 조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은 부재했고, 아메리카 정치인들의 행동이 영향을 주었다. 메사추세츠 의회는 톤젠드법에 반대하기 위한 협력을 촉구하는 회람편지를 통과시켜 식민지 의회에 송부했고, 버지니아 의회에서는 영국 의회, 국왕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법만큼 중요한 것이 관례라고 있다. 영국에서 파견된 세관위원들은 관례를 깨고, 보스턴에 정박된 리버티호를 사소한 절차상의 트집을 잡아 나포하도록 지시하였다. 도시의 시민들은 폭동과 집회를 통해 군함의 퇴거와 선박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메사추세츠 총독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고, 영국군함은 보스턴으로 입항한다. 리버티호 사건으로 톤젠드법 폐지를 위한 영국 물품 불매운동은 소수 지역을 제외하고, 전역으로 파급된다. 상인 단체 민간단체들의 합의는 영국물품 수입거부와 아메리카 제조업 장려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는 사실상 강제성이 있었다. (워낙 이해관계가 다양하여 일부는 합의에 참여하기를 꺼려했으나 대다수는 제재에 지지하였다. 또한 공동체의 합의를 거스르기 어려웠다. '자유의 ' 대해선 망신주기, 명단공개 등을 통해 사회생활을 불가능하게 했다.)

한편, 보스턴 주민들은 주둔한 영국군을 껄끄럽게 여겼다. 각종 범죄와 군의 경직된 분위기는 도시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병사들도 열악한 주거문제나 적대적인 분위기 등의 고충을 가지 있었다.) 1769 세관 보조원의 우발적인 소년 살해사건으로 인해 분노한 청년들은 둔기 등을 사용하여 군인과 충돌하였다. 1770 3 5 , 분노한 군중들과 군인의 몸싸움 우발적인 발포로 시작되어 군중 11명을 살해한 보스턴 학살사건이 일어난다. 의외로 군인들은 재판절차에 따라 처벌받았고, 톤젠드법도 대다수 시정되었다.

 그러나 차세법은 폐지되지 않았는데, 식민지인들에게는 금액의 문제가 아닌 영국의 과세권이라는 족쇄가 남아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이는 영국의 '폭정( 가능성)' 증명해주는 장치였기 때문에 정치적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화약고 역할을 하였다. 1773, '가짜 인디언들' '바닷물로 차를 우려내는 사건' 발생한다. 위기를 느낀 영국의회는 즉각 반응하여 보스턴의 봉쇄, 메사추세츠 정부의 직할령화 5개의 법을 차례로 통과시킨다. 이에 대응하여 전역에서 상인, 정치인 등이 자발적으로 대륙회의를 개최하였다.

 1 회의는 식민지의 포괄적인 권리를 침해할 없다는 선언과 함께 경제적인 단호함을 보여주기로 결의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검소, 절약, 근면, 사치금지와 같은 프로테스탄트적 윤리를 분명하게 언급했다는 것이다. 대륙회의에서 무장투쟁이 결의된 것은 아니었지만 영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압받던 메사추세츠에서 무장을 시작하였고, 식민지 전체로 확산된다. 한편 본국과 식민지 주둔 영국군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국왕과 내각은 식민지인들이 단순한 오합지졸이고, 지도자들만 체포하면 사태가 종결될 것이라 판단하였다.

 

 

 개전

 

 미국독립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기습으로 시작하였다. 콩코드의 무기를 압수하기 위해 원정군은 야간에 보스턴을 출발한다. 하지만 출발 전부터 공격계획이 누설되었고, 영국군은 도심에서부터 끊임없이 시민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병들과 교전 끝에 대패한다. 2 대륙회의에서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영웅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대륙회의는 공격 목표 결정, 양병과 보급, 외교 등을 지휘하는 전시 총사령부 역할을 하였다.

 1776 3 하순 보스턴에서 영국군을 축출한 7월에 국왕에 대한 탄원서 제출했다. 아메리카인들에게는 아직까지도 독립에 대한 확신은 부재했었다. 10월에 영국국왕은 아메리카 봉쇄와 역적 토벌을 명령했다.

 

 

 새로운 '계약' 언명하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한 가이드라인이라도 없으면 행동하기 어려워한다. 토머스 페인의 <상식> 당시 아메리카의 상황과 행동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해준 책이다. 단호하게 군주제, 영국정부의 부패성을 공격하고 권리 수호를 외치며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1776 3 무렵 국왕의 독일용병 파병계획으로 아메리카의 온건파들도 영국을 이반하였다. 7월에 독립선언서가 발표된다. 3월에서 7 사이에 수많은 독립선언이 있었지만, 7월의 독립선언은 모든 지역의회의 비준을 받아 대륙회의에서 공표한 것이었다. 논리의 주축은 로크의 사상으로, 인간의 양도불가능한 권리(자연권) 생명권, 행복추구권, 자유권을 내세웠다. 영국 정부와 국왕의 폭정을 열거하며 그것이 정치체의 계약 해지의 원인임을 말하고 있다.

 

 

 미국독립전쟁의 양상

 

 미국인 이야기 2~3권은 미국독립전쟁의 경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상세한 개략은 생략하고 아메리카가 전쟁에 승리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강병이었던 영국군은 시민군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보일 없었을까(*사견이 많이 들어가 있음)

 첫째 원정군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미국 동부의 남북으로 광활한 영역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영국군의 수는 수만명 수준이었다. 전투를 수행하면서 수송로, 점령지를 보호해야 하는데 아메리카군에 비해 수가 압도적이지 않았다.

 둘째, 양측의 병기수준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아메리카군도 머스킷과 박격포, 중포 등의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아메리카군이 사용한 수렵용 라이플은 영국군의 머스킷보다 장전속도는 느렸지만 명중률이 높았다. 이는 이후 유럽군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약 19세기 중반 전쟁이 일어났으면 유럽의 빠르고 선진적인 병기와 군제로 인해 시민군이 패배를 당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본국과 아메리카 대륙의 거리는 복합적인 문제를 낳았다. 영국정부는 대전략이 없었고 현지와 의사소통도 원활하게 하지 못했다. 대전략의 부재는 군사행동의 지연과 미진한 대륙 봉쇄, 프랑스의 참전의 실책을 만들었다.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불리한 상태였고, 혁명의 확산 문제, - 관계에 대한 의구심으로 참전을 꺼려했다. 영국은 유럽 각국의 개입을 낙관적으로 판단한데 반해 대륙회의에선 프랑스의 경제적 이권을 보장하는 적극적으로 설득을 하여 내전이 아닌 국제전으로 만들어내는 것에 성공하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워싱턴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전쟁의 지휘를 맡은 것이다. 그는 프렌치 아메리카 전쟁에 종군경험이 있으면서도 유럽 전술 연구에 매진하였다. 덕분에 기존의 유럽의 전쟁과 다른 방식으로 독립전쟁은 진행되었다. 영국군은 유럽의 정규전인 밀집대형으로 일제사격 총검돌격을 실시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반면 워싱턴은 정규전, 유격전, 진지전, 산병전을 상황에 맞춰가며 사용하였고, 정규군과 민병을 모두 활용하였다. 그는 규율과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유분방한 병사들에게 전쟁의 목적을 상기시켰다. (그럼에도 당시 아메리카군에서 여러 원인으로 상당한 탈영병이 발생하였다) 또한 전투에 패배했음에도 결정적인 섬멸을 당하지 않았다. 만약 워싱턴의 군이 번이라도 섬멸당했다면 독립전쟁은 바로 끝이 났을 수도 있었다.

 

 강화 이후

1781 프랑스 함대의 체서피크 해전과 - 연합군의 요크타운 포위전으로 영국 원정군 주력은 항복하였다. 1782 11월에는 영국과 아메리카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1783 9월에는 모든 당사국들의 서명으로 국제전이 종결되었다. 주권을 인정받은 13개주는 미합중국이 되었고, 영국의 아메리카 서부영토도 양도받았다. 12월에는 워싱턴이 공화정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 공직에서 물러난다.

전후 미국에는 다양한 현실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전시에 발생한 부채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새로 획득한 서부영토의 관할권 문제도 있었다. 주와 연방의 관계도 설정해야했다. 주는 전쟁 전부터 주헌법을 제정하여 인민들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연방헌법은 1787년에 제정되었는데, 백인백색의 의견들이 치열하게 오가는 와중에 새로운 생각들이 도입되었다. 이전까지 인민의 단일한 의지를 이상적으로 여겼지만, 미국인들은 현실을 겪으며 다수의 폭정을 우려하였다. 다원주의를 인정하여 과도한 권력의 제한, 이익집단의 인정, 당파주의를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할 있다고 깨닳은 것이다. 동시에 인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여 인민의 통제를 받는 하원을 개설하였다.

 

 

 책에서 나가며

 미국독립전쟁은 수많은 의의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적으로 소외받았던 하층민들도 자유와 권리를 위해 스스로 투쟁할 있었던 계기였다는 것을 꼽고 싶다. 민주정이 튼튼한 이유는 순간,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위기를 극복하며 강해진 축적물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외세에 의해 민주공화국이 위기에 처해있다. 민주정을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과 의지만큼은 240여년 전의 아메리카인들이 가졌던 그것과 다르지 않아보인다. 과거를 이해하기에도, 현재를 이해하기에도 적절한 책이라고 생각하기에 미국인 이야기를 추천한다.

 

 

 

게시글은 부흥카페 서평이벤트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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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이야기 1 : 독립의 여명 1763~1770 - 혁명은 경제에서 시작된다 미국인 이야기 1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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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어가며

근대 국가는 외견상 항구적이고, 아주 튼튼해 보이지만 빈번하게 탄생과 소멸해왔다. 보통은 개혁, 혁명, 독립, 국제조약을 거치는데,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도 1945년 이후 정체, 국체가 변동했을 정도이다. 국가의 탄생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미합중국이다. 18세기에 13개의 식민지에서 자발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 튼튼한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선 과정은 질서정연하고,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혼란과 미지의 선택의 연속이었다.

미국인 이야기 1권의 서평에서는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가졌던 이념과 사상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종장에서는 동아시아와의 비교로 마무리 지어려 한다.


독보적인 강대국, 18세기 영국


1755년, 7년전쟁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산된다. 프랑스군과 아메리카 식민지군의 교전이 시작되었고, 프렌치-인디언 전쟁으로 발전한다. 영국은 초기에는 수세에 몰렸지만 윌리엄 피트 내각하에 위기를 잘 극복하여 대륙, 인도, 아메리카에서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1761년, 조지 3세는 의욕적인 피트를 실각시키고, 전쟁의 강화를 체결한다.

당시 프랑스는 온 유럽에서 선망받는 국가로, '변방'의 영국과 대비되었다. 프랑스는 선진적인 과학, 사상, 근대적 인프라,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영국은 이미지상으로는 (매력적이지 않고 비정통적인) 대의정치에 의해 왕권이 제약받고 있었고, 해외 진출과 사략행위에 몰두하는 국가였다. 그러나 영국은 식민지 경영, 교역, 전쟁으로 인해 매우 강력한 국력을 축적한 상태였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수많은 공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동유럽이나 북유럽, 남유럽에는 허약하거나 상업과 산업이 지체된 국가들만 존재하였다. 프랑스도 구체제가 내부를 갉아 먹고 있었다.

18세기까지도 세계 각국에서는 공익 추구, 복지 등은 낯선 것이었다. 정책, 행정, 외교는 국왕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고, 왕은 자유롭게 내각, 관료를 선출한 것은 특별하지 않다. 의원들은 봉사가 아닌 가문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입후보하였다. 영국의 지방 행정은 지방정부, 교구, 자치구, 특별기관이 수행했다. 수많은 특별기관은 법령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중앙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녹지 준설, 도로 건설 등을 수행했다.


아메리카인의 자부심


아메리카인들은 그들의 풍요로운 영토, 발달한 상업, 수공업, 종교적인 열정, 유럽적 기반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개척과 노동을 신성시하였다. (예를들면 근세 일본의 경우에도 사회상과 맞물려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영국에 대해서는 존중하는 태도를 가졌다. 당시 세계 절대다수는 전제국가였지만 영국은 입헌군주국이었고, 아메리카를 보호하는 부모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종의 이주는 인구증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노동단위당 산출량은 증가하였고, 무역 규모도 커졌다. 그러나 잦은 사회변동,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경기는 호황과 불황을 반복하였다. 또 도시의 대상인과 농촌의 대지주로 부가 집중되는 현상으로 계층화가 심각했다. 대지주는 특권을 받는 귀족이자 장원의 소유자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영국의 특허장은 지대수취권과 재산몰수권한, 재판권을 보장했다. 대다수 인구는 평생 소규모 촌락에 거주했다.

아메리카는 특이한 정치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토지소유자와 임차인에 투표권을 부여하여 대다수 백인 성인 남성은 지방선거에 투표가 가능했다. 식민정부는 본국처럼 특정 인물들이 관직을 나누어 가졌지만, 정치적인 목적보다는 경제적 이권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는 기독교와 유럽의 비주류인 자유주의적 사상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청교도주의와도 밀접한 휘그사상은 전제정에 대한 반대와 권력분립을 중시하였다. 종교는 다종다양한 아메리카인을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였다. 유럽에 비해 종교적인 열망이 강했고, 평신도의 권한이 강력하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절대자의 존재는 후에 '대영제국'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었다.


영국 정부의 실책


잦은 전쟁, 거대한 군, 관료제의 상비에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된다. 영국정부는 기존의 토지세만으로 충당할 수 없어 차입, 은행대출, 주식, 펀드, 물품세 부과 등을 도입하였고, 아메리카에도 적용되었다. 식민지 경제정책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속국이라는 관념으로 인해 무질서하고 경직적으로 시행되었다.

1763년 프랑스와의 전쟁 후에 아메리카에 주둔한 상비군은 지역주민에 대한 충분한 설득없이 서부 팽창을 저지하였다. 처음에는 영국 내에서 물품세를 부과하였지만 서머싯주와 데번주에서 사과주세 철폐운동을 벌이자 영국의회는 식민지에도 부담을 전가하고자 하였다. 부주의한 법률제정은 당밀법에서 시작된다.

18세기 대서양 삼각무역에는 북미, 서인도제도, 유럽, 아프리카가 엮여 있었다. 그 중 럼주와 당밀, 설탕이 중요하였는데, 원료인 당밀은 프랑스/네덜란드령 서인도제도에서 밀수할 수밖에 없었다. 1764년에는 설탕법으로 관세와 강화된 처벌을 규정하였다. 당시 식민지 경제는 7년전쟁의 종결로 인한 수출 감소로 불황에 빠지고 있었다. 영국의 엄격한 밀수단속으로 식민지 곳곳에서 관리와 선원들은 충돌하였다. 상인들은 본국에 '무역백서'라는 논리적인 문서를 보내 법안 철폐를 촉구했다. 거기에 인지세법 제정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초기에는 아메리카인 대표자들이 내각수상과 면담을 요청하며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보스턴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식민지 징세원들은 위협을 느껴 사임했다.

결과적으로 1766년 영국의회에서 인지세법 철폐되었지만 엄청난 후폭풍을 만들어냈다. 첫째, 영국에 순응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도록 각성을 일으킨 것이다. 조직적인 정치적인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불합리적인 과세에 공공연하게 반대하였다. 둘째, 영국에 대한 의심이 확신으로 바꼈다. 18세기 영국에는 비주류 의견이지만 매관매직 등 부정부패를 개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메리카에서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들은 타락한 영국이 식민지에 대해 각종 권리를 침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럼에도 영국정치인들 다수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국내외의 상황에 따라 아메리카 식민지에 과세하기를 원했다.


재산의 보호와 의회제도는 왜 중요한가?


현대의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조세평등주의와 조세법률주의가 규정되어 있다. 헌법에 수록된 내용은 대다수 역사적으로 불의한 권력에 맞서 쟁취한 권리이다. 존 로크는 재산의 정의에 물질뿐만 아니라 신분, 자유, 평등, 생명 등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물질이 사회적, 정신적 권리가 결부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개인의 동의없이는 재산을 함부로 침해할 수 없었다. (다만 노예의 권리에 대한 인식은 부족하였다.) 변화무쌍하게 개척이 진행되었던 식민지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로크의 관점을 수용하였다.

한편으로는 의회의 권력한계에 대한 성찰도 시작되었다. 당대에 의회권력은 자기통제에 의해서만 제한이 가능했고, 실질적으로는 한계가 없었다. 특히 아메리카 사상가들이 볼 때, 식민지 신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영국의회의 독주를 제어하고 관할권을 제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에 대한 답은 당시에는 미완된 상태였지만, 그들은 관습법을 존중해야 하고, 식민지 과세는 한계가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1권을 서평을 마무리지으며


동아시아와 영/미의 비교사적 검토도 유의미해보인다. 양 문화권의 정치적 의사표현 문화에 대한 생각을 간략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명대 중국의 도시민들은 부당한 요역, 세금 등의 경제적 문제에 대해 종종 폭동을 일으켜 항의하였다. 예외적으로 개독의 변은 관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정치적 목적을 수반한 항쟁이었다. 에도 막부의 전직관리이자 양명학자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덴포 대기근의 분위기에서 정책의 부당성에 항의하며 오사카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홍경래의 난은 지역차별, 경제적 착취 등과 맞물려 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역사적으로 진전을 하는데에는 실패하였다.

동아시아는 언로를 보장하였고 나름의 논리체계를 중시했다. 관료들에게 도덕적 책임감을 강조한 것도 선진적인 문화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계층은 협소하였고다.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는데, 정치적 행동은 특히 금기에 해당하였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도 분명히 했다. '조법(祖法)'이라는 개념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게 하였다.

영국의 정치적 분위기는 일견 무질서해보이는 소요, 폭동 등의 폭력이 수반되었다. 엽관제와 매관매직을 공식적으로 시행하여 부정부패와 합법의 선이 모호했다. 하지만 어느 수준까지의 시민들의 단체행동, 시위는 용인하였다. 탐욕과 이권 못지않게 법논리와 토론을 중시하여 논리적인 대응을 중시했고, 표현의 자유도 넓게 인정했다.


역설적으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여 안정을 중요시한 동아시아는 모두 정체가 변화하였고, 지속적으로 변화를 수용한 영미 양국은 정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각 문화권의 배경과 발달 경로는 상이하기 때문에 우열을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미권이 단순히 풍족했다는 이유를 넘어 선진국으로 발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본 게시글은 부흥카페 서평이벤트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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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영국헌정 - 역사와 담론 한길신인문총서 21
이태숙 지음 / 한길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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