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 열정 용기 사랑을 채우고 돌아온 손미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손미나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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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 조가 되어 우리나라와 한판 승부를 펼치게 될 남미 국가 아르헨티나. 한반도의 열배가 넘는 큰 땅덩이에 칠레, 우루과이, 볼리비아, 파라과이와 국경을 이웃한 나라, 마라도나가 떠오를 정도로 세계 7위의 축구를 잘하는 나라 아르헨티나.  

영화 에비타(Evita)에서 나오는 애절한 노래 'Don't Cry For Me Argentina'가 들려오기도 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로부터 추앙받는 사회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태어난 고향으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감동적인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픔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건지 내게 아르헨티나는 왠지 축구 강국보다는 슬픈 한이 많을 것 같은 나라로 다가오곤 한다.   

일생을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아르헨티나의 도시와 사랑에 빠져 지내던 왕가위 영화 감독은 평생을 벼르고 별렀던 야심작 <해피 투게더>를 만들었는데 원래 이름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였다고 한다. 영화가 완성된 뒤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 아르헨티나는 그런 곳이었다고, 실제로 알기 전에는 잘 알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는데 막상 겪어보니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어떤 곳인지 표현하기는 더더욱 힘든 난해한 사랑 같았다고.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의 저자 손미나는 역사나 축구보다 학창시절 우연히 보고 접한 탱고 공연과 아르헨티나가 낳은 천재 작가 보르헤스의 작품들에 마음을 빼앗겨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여행을 떠난다. 나도 가끔 TV에서 탱고춤을 보긴 했지만 얼마나 매력적이기에 비행기로 가는 데만 이틀이 걸린다는 멀고도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기까지 했나 궁금해서 책장을 서둘러 넘긴다.   

다양한 이민족들이 어울려 사는 나라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가 주는 환상과 로망, 그것을 뛰어넘는 도시 곳곳의 열정, 사랑과 열망, 아픔과 열정이 공존하는 신비로운 그 도시의 비밀을 한꺼풀씩 벗겨가는 일은 진정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 본문 중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여행한 저자의 심정이 담긴 글인데, 누가 내가 사는 도시 서울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이 나라에 대해 호기심과 함께 부러움마저 느끼게 된다. 그것은 드넓은 대평원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소들, 결과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스테이크와 감미로운 와인,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도시의 수려하고 세련된 유럽풍의 이국적인 건물들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르헨티나 사람은 스페인어로 말하면서 프랑스인처럼 생각하고, 유대인처럼 일을 하고 스스로를 독일인이나 영국인이라고 착각하는 이탈리아인이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다양한 민족이 충돌하고 융화하면서 생겨난 독특한 문화에 대한 느낌일 것이다. 

그런 문화 덕분인지는 몰라도 춤추는 슬픈 생각, 노래하는 영혼, 아르헨티나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하는 탱고가 생겨나고 탱고의 황제 '카를로스 가르델'이 탄생하여 탱고라는 예술적인 춤과 노래로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전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요즘은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천국이니 우리나라보다 더 심한 성형의 나라, 세계 최고 거짓말쟁이들의 나라라느니 하는 오명도 생겨났다고 하지만.     

그러다보니 이민자의 후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아 아르헨티나에는 심리학자가 무척 많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 물음을 온 국민이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나라, 그래서 많은 국민들이 일주일에 한번씩은 정기적으로 심리상담을 받는단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탱고춤을 추는 예술활동 역시 스스로를 치유하는 심리치료가 아닐까. 16세기 에스파냐(스페인)가 침략해 원주민들을 죽이고 쫓아내 세운 이민국가의 원죄 때문이 아닐까 하는 쌩뚱맞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사랑 보카, 챔피언이 되어주어 고마워  

'이름도 바꾸고 성도 바꾸고, 종교도 바꾸고 국적도 바꾸고 마누라도 바꿀지언정 내가 지지하는 축구팀만큼은 절대 바꿀 수 없다.' 아르헨티나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축구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라 자존심이고 열정의 대명사이며,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마다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준 절대적인 존재다.  

우리나라도 그랬듯이 축구나 야구같은 스포츠들이 국민들의 관심과 불만을 정치에서 떼어내려는 국가의 기만술에 활용되는 건 더 심하면 심했지 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이 나라는 그런 것을 뛰어넘는 것 같다. 우리의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만큼이나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극적인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86년의 월드컵 축구경기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영국에 자국의 영토였던 포클랜드 섬을 영영 빼앗긴 아르헨티나는, 1986년에 전쟁 상대국 영국과 축구로 월드컵 16강에서 정면 승부를 하게 된다. 우리의 한일전만큼이나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던 그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2-1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축구 종주국인 영국의 콧대를 꺾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대신해 한풀이를 제대로 한 셈이다. 게다가 결승에서 세계 최강 중 하나인 독일을 만나 후반 5분을 남겨두고 극적인 한 골을 성공시켜 우승컵까지 거머쥐었다.  

그런 축구 역사에 아니 아르헨티나 역사에 길이 남을 두 골을 넣은 사람이 바로 극 빈민촌 출신의 디에고 마라도나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시 영국과의 경기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각본을 쓰고 연출까지 한 두 골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헤딩을 하면서 너무나 절묘하게 손으로 슬쩍 밀어 넣었던 첫 번째 골은 지금도 '신의 손이 넣은 골'로 유명하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날 경기에서 마라도나의 손은 그야말로 신의 손과 같은 역할을 해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크나큰 기쁨과 위안을 안겨주었고, 지금까지도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다.     

마라도나의 세 가지 꿈 중 하나였다는 보카 주니어스팀 선수. 수많은 이민자들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받아들인 항구 '라 보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축구팀인데, 아르헨티나 서민들에게는 단순한 축구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 독재정권은 새발의 피였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1970년대 군사독재 권력의 횡포와 저항하던 국민 3만여 명을 사망하게 하거나 실종하게 한 인권유린 등의 풍파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사람들에게 축구는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된 유일한 탈출구였다고 한다. 민주화된 근래에도 나라가 휘청할 정도로 끔찍한 경제위기가 반복되면서 파산하고 힘을 잃은 서민들이 시원하게 골문을 차고 드는 공을 보며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빈민촌의 스타 배우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  

탱고와 보르헤스의 시(詩)에 끌려 떠난 작가는 시간이 지나고 현지 주민들과 어울리고 얘기를 나누면서 아르헨티나의 다른 모습들을 경험하게 된다.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말하는 안데스 산맥이 있는 북쪽지방의 원주민 지역, 세상의 끝 파타고니아, 아르헨티나의 심장이라 불리는 대평원 팜파 그리고 경찰들조차 가기 꺼려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외곽 빈민촌이 그곳들이다.    

우연히 알게 된 영화 스타라고 하는 사람이 집이라며 초대한 곳이 '비야 21'이라고 하는 소외된 빈민촌이다. '비야'는 스페인어로 '마을'이라는 뜻인데 중남미 지역에서는 극빈민촌을 구분하는 행정단위로 고유의 이름도 지니지 못하고 있는 살기 비참한 동네들이다. 택시기사에게도 세 번 거절을 당한 다음에 겨우 찾아간 이곳은 아르헨티나에 와서 본 모습과 너무나 달라서 과연 같은 도시, 같은 나라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니 아르헨티나도 다른 남미 국가들처럼 매우 심각한 빈부격차를 겪고 있나 보다. 

어릴 적부터 꿈이었다는 영화 배우를 하고 싶어서 무작적 영화감독을 찾아다니다 조연이나마 꿈을 이룬 이 빈민촌의 스타배우는 무려 열일곱 명의 자식을 둔 장년의 가장이다. 얼마 전부터 동네 젊은사람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는 영화 학교를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는, 영양부족으로 이가 듬성듬성 빠진 이 아저씨는 우리를 슬프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라고 말한다. 그런 그가 말하는 행복의 조건이란 과연 어떤 것들일까. 

탱고춤과 아름다운 도시를 동경하여 떠난 여행기에도 아르헨티나인들의 아픈 상처와 한(恨)이 그려져 있는 건 지금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 나라 정치·경제의 암울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인종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책으로나마 대해 보니, 이번 남아공 월드컵 축구에 나오는 아르헨티나 선수들이나 응원하는 국민들의 열광적인 모습이 남다르게 보일 것 같다.    

참조) 이 책 끝부분에 나오는 이국적이고도 간단한 인사말을 적어본다.

ㅇ 감사합니다 : 무차스(Muchas) 그라시아스(gracias).

ㅇ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 소이(Soy) 데(de) 꼬레아(Corea) 델(del) 수르(sur).

ㅇ 제 이름은...입니다 : 메(Me) 야모(llamo) ...

ㅇ 안녕히 가세요/계세요 : 아디오스(Ad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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