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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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고물줄이 헐렁하게 늘어나고 누렇게 물이 빠진 면 팬티는 말하자면, 나의 마지막 보루다. 

p.9


남자애와의 데이트가 대부분 그렇듯 오늘도 베니건스에서 샐러드와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특별히 갈 곳이 없었다. 상우가 "비디오방이나 갈래?" 했을 때 나는 "글쎄......"하며 얼버무렸지만 결국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p.10  


남자들은 다 똑같다.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저 여자랑 한번 자볼까 하는 궁리밖에 하지 않는 주제에 급할 때마다 비밀 병기처럼 사랑을 들이댄다. 사랑하니까 키스해야 하고, 사랑하니까 만져야 하고, 사랑하니까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사랑! 피가 한곳으로 몰려 갑갑한 느낌을 해소하고 싶은 몸의 욕망이 도대체 사랑이랑 무슨 관계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p.15~16


...... 다음날부터 나의 컨셉트는 청순함이었다.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흰색이나 파스텔 계열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정성껏 드라이하여 어깨쯤에서 찰랑이게 하고, 말을 많이 하는 대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 되었다. 스킨십에 있어서도 조신하려고 애썼다. 그렇다. 마침내 내 인생 스물두 해를 걸고 배팅해볼 만한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p.27



반포 27평 주공아파트에 살고 있는 스물두 살 여대생 유리는 아주 영악하게 자신의 어장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에서 제일 좋은 대학의 의대생인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상우에게 마음이 가지만 차가 없는 게 불편하고, 문자만 보내면 바로 은색 투스카니를 몰고 데리러 오는 민석이는 사랑을 핑계로 욕망을 채우려는 게 부담스럽다. 그녀가 배팅을 해보기로 마음먹은 그는 겨울 방학쯤 결혼을 생각하는 미국 로스쿨에 다니는 부유한 집 막내 아들이다. 과연 그녀의 배팅결과는?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 당선작인 정이현의 단편<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자신이 가진 가치를 어떻게 활용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지, 욕구와 목표가 아주 명확한 이십대 여성을 거침없이 묘사한다. 또한 짧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젊은 남녀들의 연애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는지가 현실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수정>을 연상케 했다. 나름대로는 꼼꼼하고 완벽한 준비로 자신의 '낭만적 사랑'을 달성하려는 그녀를 자신있게 '속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약을대로 약아진 이 '사회'에서 과연 그녀가 생각하는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참고로 정이현 작가의 첫 단편집에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외에도 <트렁크> <소녀시대> <순수> <무궁화> <홈드라마> <신식키친> <이십세기 모단 걸_신 김연실전>7편의 개성강한 단편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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