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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글쓰기
신나리 지음 / 느린서재 / 2025년 7월
평점 :
이 책을 3일만에 미친듯이 읽었다. 다 읽고 내린 결론. 이 책은 실용서다. 글만 건드리지 않고 삶도 건든다. 흔들어 댄다. 이런 게 진정 '실용' 아닌가. (그러나 펴들기 쉽지 않은 실용서다. 그녀의 전작들이, 평소에 알려진 소위 '페미니즘적'인 글들이 이 책을 펼치기 겁 먹게 만드는 허들일 수 있겠다.)
내가 ‘흥분하며’ 이 책에서 배운 글쓰기의 핵심은 이것이다. 글쓰기는 나를 쓰는 것이라는 것. 여기서 나를 쓰기란, 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 지를 묻는 쓰기다. 이 책에 나온 다른 말로 예를 들어 보겠다. 내 얘기를 남 얘기처럼 쓰기. 나만의 기록이 아니라 사료 혹은 르포처럼 쓰기. 안다는 전제를 버리고 모른다고 생각하고 쓰기. 의도나 추측이 아니라 상태를 쓰기(엄마됨을 쓴다고 했을 때, 엄마됨에 대한 내 이상과 가치관이 아니라, 아이 앞에서 내가 어떤가 쓰기), 지배 구조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 구조를 내면화한 내 모습 관찰해서 쓰기. 우리는 우리를 설명하고 싶어하지만, '무언가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나를 절대 설명할 수 없다.’(116) 설명하지 말고 관찰하고 드러내야 한다.
차갑고 냉정하다고, 무정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쓰는 건 오히려 '독자가 들어올 문을 여는 일이다.(109)' 오히려, 오히려! 작가 비비언 고닉의 말을 빌리면 '글쓴이가 감정을 내뱉으면 독자는 그만큼 멀어진다. 개입할 틈이 없으니까.' 더구나 나를 관찰하는 글쓰기는 작가님 말대로 굉장히 실용적인 장점이 있다. 글감의 광맥이 생긴다. 내 생각을 덧붙여보자면, 글감에 더해 문장도 무한 생성된다. 사유를 짜내는 것보다 관찰을 하고 그것을 서술하는 게 배로 쉽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고통은 사유를 억지로 뽑아내는 데에서 생긴다. 그러나 관찰한 것을 쓰면 일정 양이 확보되고 더 나아가 자연스레 의문과 사유도 피어오른다. '주제는 쓰다가 얻어걸'리게 되어 있다. 이토록 자연스럽고 유기적인 글쓰기라니.
관찰에서만 끝나면 안된다. 거기서 피어오르는 의문을 파헤치고 사유를 정밀하게 다듬으려면 '사고하던 방식을 헤집고 쑤셔대는 책을 읽어야한다'(44) 아니 에르노, 박완서, 도리스 레싱, 비비언 고닉, 조앤 디디온, 사라 아메드 등. 그녀의 글 구독자라면 익숙한 저자들의 책이 곳곳에 소개돼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겨우' 이 책들을 읽을 욕망이 생겼다. 이제야 펴 들 수 있겠다.
작가님은 글쓰기의 태도로 장인의 태도를 제안한다. 엄숙하고 무거운 게 아니다. 장인들은 행위와 수정을 반복하며, ‘하면서’ 깨닫는다. 이분들에게 '사유는 해석이 아닌 '행위'에 가깝다.’(169). 설명이 아닌 작업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나를 설명하는 글이 아닌 글로 나를 설명하는, 작가님의 글쓰기론과 맞닿아있다. 장인처럼 글쓰기는 별다른 게 아니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될까'와 같은 자책에 빠질 시간에 수정을 더'하는 태도. '그저 하고 또 하고 되풀이 하는 와중에 천천히 변화'를 만들어내는 태도다.
신축 아파트, 깔끔한 거실에 앉아 있는 딸 아이의 뒷모습. 딸아이와 나의 하모니가 최고조라 자부하는 안정적인 시기. 슬슬 숨이 막혔다. 아이가 단 하나인 것도 숨이 막혔다. 아이에 나를 최적화시키고, 일도 시작하고, 남편과도 그런대로 잘 지내고. 이 안정감이 주는 역설적인 숨막힘. 마침 아이도 동생을 원했고, 나도 슬슬 둘째를 욕망하게 됐다. 생명을 욕망한 게 아니라 숨막힘에 균열을 내 줄 계기가 필요했다. 둘째를 가졌고 임신을 계기로 남편에게 '겨우' 가사를 분담하기 시작했다. 출산 후 가사를 ‘외주’ 줄 상상을 하며 신나했다. 아이와의 힘든 놀이도 '엄마 이제 배가 나와서 힘들어'라는 말로 줄이고 있다. 변화의 강력한 계기, 명분을 손에 쥔 셈이다.
이 변화가 만족스럽지만 이 책을 읽고 이런 의구심이 들었다.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스스로 변화를 열어갈 수 있었을까. 나는 왜 이러한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스토리는 나만의 ‘특별한’ 사례가 아니기에 그럴듯한 서사로 퉁칠 수 있지만 작가님 말처럼 진짜 원인은 알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원인이란 현재를 설명하고 과거에서 유리해보이 는 단서를 조합해서 만들어낸 값이자 믿음에 가깝’(113)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선 책을 읽으며 이 지점을 주목하게 됐다는 게 중요하다. 나를 보는 하나의 '조각'을 찾은 것이다. 이 조각을 쥐고 내 과거와 지금을 살펴보면 많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행복, 결혼, 엄마됨. 우리를 짓누르는 관습과 통념들을 해체하는 내용도 함께 실려있다. 행복은 우리에게 ‘ 일시적 기분이 아니라 지속, 도달해야할 기준이 됐다.(177)' 는 것. 이 부분을 읽고 행복한 부부, 행복한 엄마라는 비유 속의 ‘총체적인 행복’이 원래부터 불가능한 것임을 처음으로 납득했다. 근대적인 결혼관이 ‘결혼. 사랑과 친밀함, 섹스까지를 하나의 관계에 제도로 우겨넣은’ 것이라는 부분에선 무릎을 쳤다. 친구들에게 내 '부부관계' 얘기를 했을 때, 그녀들이 보인 ‘연민’어린 표정이 생각났다. 그 연민이 불편하고 끝끝내 나를 설득시키지 못한 원인을 알았다. 그 모든 걸 해내야 한다고 그녀들은(물론 나도)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끝으로 이렇게 살아야겠다, 라고 번쩍한 문장들을 소개하고 싶다. 이 책 전체에 글쓰기와 삶에 관한 씨앗문장은 넘쳐나지만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부분에선 이 문장들이 내게 씨앗문장이다.
‘생의 추동력으로 행복 대신 호기심을 따랐다. 그러자 삶에 만족감 대신 역동이 생겼다.’(190)
‘쉽게 결론내지 말고 모호함과 불확실함 속에서 몸을 조금씩 움직이며 삶을 조율해 본다.’(191)
이 책을 읽고 몸을 조금씩 움직여 볼 힘이 생겼다. '조금씩'이라는 단어에선, 조금 더 힘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