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겔다마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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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가들이 그를 너무 멀리 보냈다.
  김현이 그를 너무 사랑했었다. 그가 이룩한 것은 이제 공허한 낱말과 현학적인 잡어들로 가득하게 되어버렸다. 이제 어떤 것도 비평의 절대성을 보장하지 못하므로 나는 또한 문지의 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 책을 비판할 뿐이다. 나는 박상륭씨를 욕할 것이다. 다시 말해 박상륭씨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지식 폭력'의 한 전형이다. 그리고 그를 떠 받들고 있는 것은 우울한 문지의 아우라이거나, 기성문단의 어른임에 대한 암묵적인 존경이거나, 그게 아니면 모든 것을 쓸 수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포용력일 것이다.

 

   해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풍부한 은유와 상징'을 갖다 붙인 비평가의 거침없는 입담을 보라. 박씨의 소설이 읽히지 않자 그는 슬그머니 은유와 상징을 갖다붙인다. 그렇지만 만약 등단하지 않은 작가로서 그의 글이 그에게 읽혔다면 박상륭의 목숨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그는 '무의미한 소설, 자폐아적인 흉물'로 단죄 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의 부재, 반성적 사유부재 그리고 그 현실인식이 풀어낼 인간의 형상화 능력의 완전한 상실이라고. 이건 우아한 판타지군.

 

   이 소설이 어렵다고 한 것은 그가 당연히 의미의 코드를 끊고, 즉 현실적 인식의 코드를 단절하고 자폐의 공간 속으로 스스로 함몰된 탓일테다. (그걸 가지고 우리 문단의 가장 존경하는 작가라며 추켜세우는 시인 김정란은 또 무언가.) 그 소설은 다분히 자신의 지식적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경건하고 고풍스러워보이는 그 문체 때문에, 낯선 공간 속의 심오해보이는 대화나 서술 때문에, 그 소설이 다른 습작생의 작품과 대별되고 있다.

  그러나 조심하라. 엄연히 그의 소설은 교감이 아닌 독아적 질문이며, 문을 닫은 선방 수행자의 수행이며, 자신만의 철학적 탐구를 위한 도구로서의 장르이다. 우리는 그의 글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착각하지 말자.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현실을 인식한 뒤 예술의 질을 위한 숭고한 숨김, 압축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박상륭 자신만의 꿀을 맛보기 위해서 토굴 속으로 들어간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착각하지 말자.

   이소설은 다분히 난해하거나, 상징적이거나, 비유적이라는 말과는 구별지을 필요가 있다. 난해도, 상징도, 비유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의 장치이다. 소통이 사라진 비유는 그의 마음 속 저편에서만 현실과 마주치지 않는 저편에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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