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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은 괜찮아요 창비시선 287
차창룡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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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향살이(여행자)

우리는 타향살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에 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몇 번이고 그리운 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차창룡의 시를 읽으며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다. 이는 무엇은 의미할까? 우리 모두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어딘가에서 떠나온 존재이며 떠돌아다니는 존재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완벽히 우리를 지켜주던 엄마의 몸과 따로 떨어지는 분리를 겪는다. 엄마와의 분리는 아기가 원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는 너무 근원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엄마와의 분리 이외에도 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그리고 원했거나 원하지 않았던 '떠남'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차창룡의 시에는 이러한 떠나온 자 혹은 떠돌아다니는 자의 정서가 잘 드러난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중략)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가족들을 잊기 위해 산다
가족들을 잊지 못해 산다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기 위해 산다
헤어짐이란 고시와도 같은 것
나는 날마다 고시공부하듯 결별의 책을 읽는다
(하략)
 

-「고시원에서」 일부

  고시원은 더 이상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곳이다. 그 사람들은 가족들과 헤어져 가족들을 잊기 위해, 가족들을 잊지 못해 그 곳에서 살고 있다. 차창룡은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시원이라는 소외된 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선원의 선승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혼자이지요
홀로 존귀한 최고의 선승들입니다
108개의 선방에는 선승이 꼭 한명씩만 들어갈 수 있어요
여느 선방과 달리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중략)
이곳은 외국인을 위한 선원인 것이지요
(중략)
괜찮습니다 참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니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불이 나도 괜찮아요
(중략)
서로 간섭하지 않는 미덕이 습관이 되어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일에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하략)
 

-「고시원은 괜찮아요」 일부


  이 시는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시원에는 살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밥을 먹는다. 말은커녕 입도 벌리지 않은 채 밥을 먹고, 항상 만원인 화장실 때문에 배설의 욕망마저 참아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만원인 화장실 때문에 배설하고자 하는 욕망을 참는 것, 이를 수행이라고 표현한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과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모든 걸 참아내야만 하는 상황을 수행이라고 한 것이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심지어 불이 나도 괜찮은 곳이 있을까? 아니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괜찮을 수 밖에 없는 곳, 참을만 해서가 아니라 참아낼 수 밖에 없는 곳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미덕이 습관이 되어 자신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철저히 타자인 관계, 이들은 완벽이 남이 되어 살고 있다. 이러한 비정한 현실을 '괜찮다'고 말함으로써 정말이지 괜찮지 않음을, 도무지 괜찮을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여 관찰할 뿐, 어떠한 주장도 내세우지 않는다.

저 한없는 거부의 유연함
걷혀 있기 싫다고 끊임없이
유리벽을 들이받으나
워낙 부드러워서 자해하지도 못하는 저
물렁물렁한 것이 어찌 정력제가 된단 말이오
(중략)
들여다보고 있으니 자꾸 눈물이 난다
(중략)
비폭력의 저항을 굳게 믿은 적 있었던가
무저항의 저항이야말로
진짜 힘이라고 목청껏 외친 적 있었던가
(하략)
 

-「미꾸라지」 일부

  미꾸라지는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어서도, 매콤한 국물이 되어서도 강한 저항을 하지 않는다. 워낙 부드러워서 자해하지도 못하는 물렁물렁한 몸이 정력제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힘도 못써보고 죽는 것이다. 하지만 차창룡은 이러한 미꾸라지를 무기력하다거나 힘없는 존재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눈에 비친 미꾸라지는 갇혀 있기 싫음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한없이 유연하지만 끝까지 거부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미꾸라지에게서 그는 비폭력의 저항, 무저항의 저항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는 차창룡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지만 섣불리 주장하지 않는 그의 태도와 미꾸라지의 무저항의 저항은 같은 궤에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들에서 드러난 '떠남'의 정서는 위의 내용들, 즉 고향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에서 국한되지 않고 더욱 확장된다. 
 

천수만에는 여행중인 새들
게스트하우스는 연일 만원이다
여행중에는 항상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평생 역마살이 낀 새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중략)
아직도 여행중이시오 물으면
고단한 새들을 태우고 간월암은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다
 

-「긴 여행」 일부

  이 시에서 화자는 공간의 이동으로 인한 떠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떠남'의 의미는 삶 전체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러한 이해는 결국 우리의 삶 자체가 '여행'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차창룡의 이러한 인식이 노마드의 개념에 닿아있음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마드(nomad)는 프랑스어로 유목민, 유랑인을 뜻한다. 들뢰즈는 노마드를 단지 공간의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어디든 특정한 가치와 삶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창조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의식과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 시에서 화자는 간월암에게 '아직도 여행중이시오'라고 물었지만 사실 이 물음은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과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우리는 미처 여행이라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여행자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 곳이 확실하게 있으면서도, 삶을 정의 해 놓은 위인들의 문구 앞에서도 매번 헤매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내가 있는 이곳은 내가 있는 이곳이고
네가 있는 그곳은 네가 있는 그곳인데
모른다니 그곳이 그곳이고 이곳이 이곳인데
(하략)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일부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인식은 결국엔 내가 있는 이곳은 내가 있는 이곳이고, 네가 있는 그곳은 네가 있는 그곳이라는 설명 외엔 다른 어떠한 것도 의미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2. 윤회
  인간의 소외된 공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민했다는 차창룡의 말처럼 그의 시에는 인간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또 그런 것들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차창룡이 선택한 방법이 미꾸라지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무저항의 저항, 비폭력의 저항을 보여주는 그의 시에서 우리는 '윤회'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1
돌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 뿐만 아니라, 귀까지 열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돌은 흙의 자식인가, 바위의 자식인가? 흙이 굳어져서 만들어지니 흙의 자식이고, 바위가 부서져서 만들어지니 바위의 자식이다.
(중략)
돌은 다시 부서져 흙이 된다. 흙이 이젠 돌의 자식이다.
(중략)
5
돌은 사실 쉼없이 입을 여닫고 있다.
(중략)
돌은 세상의 온갖 말을 듣고 있다.
 

-「희귀한 자연석을 모아서 집안에 두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여기서 돌은 바위의 자식인가? 아니면 흙의 자식? 아니, 흙이 돌의 자식인가? 알 수 없다. 바위에서 깨져나온 것이 돌이고, 이 돌은 흙이 굳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리하여 돌은 바위와 흙의 자식이다. 그런데 돌이 부서져 다시 흙이 된다. 이렇게 흙은 돌의 자식이 된다. 이렇듯 돌은 바위가 되었다가, 흙이 되었다가, 다시 돌이 된다. 이처럼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이 돌은 이 모든 존재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돌의 속성 또한 분명히 규정할 수 없다. 돌은 입을 꼭 다물고 있어 몸뚱어리에 바늘 하나도 꽂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쉼없이 입을 여닫고 있다. 너무나 많은 입이 있어서, 그 수없는 입을 아무리 벌려도 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 결국 아무도 볼 수 없기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구도 들을 수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을 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입을 벌려 말하고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구도 들을 수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을 왜 수없이 하는 것인가? 유용성만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돌의 행동은 자칫 아무 의미 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 잘못된 현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쉼없이 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 차창룡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돌이 흙이 되었다가, 바위가 되었다가, 다시 돌이 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돌의 윤회는 단순히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무는 것, 그것이 무너져야 만이 펼쳐지는 화엄 만다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차창룡은 세상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상처투성이의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이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노래함으로써 세상을 보듬는다. 이러한 점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불교적 색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엔 온갖 치부를 보듬고 사랑하는 모습에서 출가하여 불도에 정진한 그의 행보를 미리 예상했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시들은 어느 것 하나 규정하지 않고 그 순간의 모습을 자유롭게 말하고 있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만 사람을 비롯한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 이것이 불가의 열반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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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 (詩魔) 시작시인선 115
김영산 지음 / 천년의시작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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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시인의 사회

1. 그가 사는 세상- 그 곳에서는 평생 처절한 전쟁이 계속된다. 

누구나 도망 갈 자리 하나 쯤은 마련해 두고 산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건 나름의 도피처가 있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게 책이건, 술이건, 잠이건 간에 사람들은 나름대로 세상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길 만한 뭔가를 하나 쯤은 마련해 두고 산다. ‘게임광’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바로 떠오른 것은 바로 ‘도피처’라는 단어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감당 못 할 만큼 슬픈 일이 있을 때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책을 읽었다. 그렇게 책의 내용에 집중하다보면 내게 벌어졌던 일이 책 속의 내용인지, 아니면 정말 나에게 있었던 일인지 헷갈렸다. 그렇게 시간을 벌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내가 감당을 해야 한다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기르기 위해 잠시 책 속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책은 잠시지만 나를 먼 곳으로 데려다 주는 아주 좋은 도피처 역할을 해 주었다. 제목만 접했을 때 게임도 김영산에게 이런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누구보다도 든든한 친구가 게임이라니 참 시인 답지 않게 귀엽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시집을 찬찬히 읽고 난 뒤 게임은 시인에게 현실을 피해 도망 갈 자리를 내어 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영산에게 있어 게임 속 세상은 현실만큼이나 숨 막히는 전쟁의 공간이다. 게다가 게임 속 세상은 가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현실의 잔인하고 치열한 모습을 보다 명확하고 극단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다시 말해 김영산이 보여주는 게임 속 세상은 실제 현실과는 관련 없는 가상의 놀이 공간이 아니라 사실은 좀 더 은밀한 곳에 숨어 있는 현실의 어두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고요함의 갈대밭과 속삭임의 갈대밭
  

더 이상 갈대는 속으로 울지 않는다
이제 갈대는 갈 데가 있다
이 지구 어두운 아이들아
너희 애비들은 죽었다(게임맹이다)
그러니 살아만다오
항상 생사의 갈대밭, 사냥터에서
 

-「게임광2 -리니지Ⅱ」 일부


아무리 강한 자도 죽음이란 게 있지
전투 수행 도중
또는 사고로 캐릭터 생명력이 0이 되면
죽음을 맞게 되지
하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게임 세계에서 죽음은 영구적인 게 아니지
묘지에 있는 영혼 치유사에게 소생을 부탁하면
일정한 경험치를 잃고 부활할 수 있지
(중략)
전사 성기사 마법사 도적 사제 사냥꾼 흑마법사 주술사 드루이드는 평생 전쟁을 할 수 있지
 

-「게임광5 -게임의 진화」 일부


게임광은 세상의 게임에선 진 자들이지
게임 속에서 전사이지만 게임을 빠져나오면 어리둥절하듯
(중략)
게임광은 게임에서 자꾸 지는 자들이지
 

-「게임광6 -여자의 육체」 일부


위 시들에서 김영산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영산에게 있어 현실은 게임맹인 아버지가 지구의 어린 아이들을 두고 죽어버린, 매순간 생사의 기로에 놓이는 사냥터와 같은 공간이다. 이는 아무리 강한 자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게임 속의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게임에서는 현실과 달리 죽은 자가 묘지에 있는 영혼 치유사에게 소생을 부탁 해 일정한 경험치를 잃고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이렇게 부활한 게임광들은 게임에서는 전사이지만 게임에서 빠져나오면 어리둥절하게 되고, 게임에서 빠져나와 만난 현실 속의 게임에서는 자꾸 지게 된다.  

그가 보기에 우리는 현실에서도, 게임 속에서도 ‘처절한 전장’(「게임광3-뮤 공상전」)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결국엔 탄환이 스쳐 젊은 얼굴은 반쪽이 되고, 팔다리가 덜렁거리는 마네킹들이 누워 있는 이 세상에서 화자는 마음 속의 증오를 키우게 된다. 그런데 그 증오를 채 키우기도 전에 살인마들이 넘쳐난다.(「게임광9」)

이쯤 되니 김영산 시인에게 문득 궁금한 점이 생긴다. 그가 이러한 어두운 현실을 나타내기 위해 끌어온 세계가 왜 굳이 게임일까? 게임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나는 『게임광』내의 게임에 대한 시를 읽을 때 어리둥절한 느낌을 받았다. 문학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게임이라는 요소를 시와 접목시킨 것은 신선했지만, 몇몇 시들은 단지 게임을 소개하고 있는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임이라는 고유의 장르가 지닌 의미를 현실과 더욱 깊이 있게 접목시켰다면 좀더 많은 독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가 사는 세상에서는 평생 처절한 전쟁이 계속 되고 있다. 아무리 강한 자도 죽는 그 곳에서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슬쩍 궁금해진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삶을 도저히 놓을 수 없어 계속 살아가는, 어떤 의미로는 모두 ‘광’적인 존재들이 아닌가. 도저히 게임을 멈출 수 없는 게임광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힘들어도 도저히 그만둘 수 없는 그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가 앞으로 어떻게 설계할지 기대해 본다. 

 

2. 詩魔

‘詩魔’란 사전적 의미로 ‘시를 지을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을 뜻한다. 김영산의 시집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접한 단어였기 때문에 난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다. 어떤 시인은 자신이 시를 쓰는 이유를 ‘고통에 대한 탐구’라고 했다. 그 글을 보고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했던 숱한 밤이 있었다. 나에겐 필연적인 무엇이 필요했다. 언젠가 작가는 선택하는 직업이 아니라 선택되는 직업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선택 받은 사람, 그래서 언젠가 시작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오랜 성찰 끝에 글을 쓰고자 하는 나름의 이유를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선택하고’, ‘선택받고’의 그 중간에서 여전히 헤매는 날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집을 읽는 내내 김영산 시인의 ‘시마에 걸린’ 시인처럼 살고 싶다는 바람에 십분 공감했다.

『詩魔』는 총 여섯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여섯 편의 제목이 모두 시마이고, 각각 ‘흑비’, ‘백비’, ‘문비’, ‘생비’, ‘게임의 비’, ‘우주게임’라는 부재가 붙어 있다.

인간의 생은 입을 다물라, 죽음이 말하게 하라!
(중략)
대답 없이 묘비가 서 있다. 나는 쓸쓸하여 참배도 잊었다. 또 밤마다 무덤을 보는 것이다.
(중략)
계속 물어야 한다, 죽은 시인을 위해!
(중략)
나는 날마다 무덤의 음악을 듣는다,
(중략)
모든 시는 처음이려 하지만, 첫 구절은 무덤 속에 있다. 時論은 없다, 시가 나를 무덤에 데려다 주리라! 시가 나를 무덤에서 데려다 주리라!
2
시는 죽은 시인의 생전이라 믿지만, 비로소 죽은 후에야 써진다.
(중략)
너무 잘 맞는 구두, 너무 잘 맞는 시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중략)
아 시가 나를 쓰는구나,
3
“시가 내 상처를 찢고, 깁는다!”
 6
광기 어린 내 시가 내 얼룩인지 모른다
시가 내 얼룩이야,
(중략)
시는 쓰면 쓸수록 갇히게 된다
 

-「詩魔 -우주게임」 일부

시인에게 있어서 시란 인간의 생은 입을 다물고 죽음이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시는 비로소 죽은 후에야 써진다.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밤마다 무덤을 보고, 날마다 무덤의 음악을 들으며 죽음과 항상 가까이 있다. 진정한 시를 쓰기 위해 너무 잘 맞는 구두, 너무 잘 맞는 시로부터 그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고, 결국엔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쓴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자신의 얼룩과도 같다. 세상의 모든 광기 어린 것들, 그렇게 자신을 들볶는 것들은 얼룩이 되는데, 시인의 얼룩인 시는 불면의 밤에 그를 찾아 온다. 그는 시를 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시는 쓰면 쓸수록 갇히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시를 놓지 못하고 다다를 수 없는 별이 시(時)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시의 탄생
지구의 문법에는 태어나면서 죽음의 문법을 배워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중략)
구역질나게 아름다운 이름이여
인제 안녕!

시의 젊음과 늙음
恐慌
죽음은, 죽을 것 같은데 절대 죽지 않는다. 미칠 것 같은데 절대 미치치 않는다.
(중략)
시인은 바람의 비밀을 들여다보려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자이다.

시의 병듦
시는 千手千眼觀音이지만
시인은 한 개 눈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중략)
시를 해체하랴, 모든 시편마다 병들었구나
(중략)
나는 부둣가에서 얼마나 서성거렸는지 모른다.
 

시의 죽음
또 다른 시인 하나도 천천히 자기를 죽여 갔으니, 자살을 해가며 시를 썼다.
(중략)
그 시인은 말했다, 기억이 없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기억이 있으면 나밖에 될 수 없다. 기억이 있으면 아무나 될 수도 있고, 아무도 될 수 없다.
(중략)
기억이 없어질 때까지 죽음의 시는 써질 것이다.

시의 부활
시의 귀환은 언제나 쓸쓸하다,
(중략)
내 뜻대로 시가 써지는 게 아니다.
(중략)
고통의 축복, 헛소리, 완성의 시는 없다. 모든 시는 실험에 불과했다. 가장 쓰고 싶은 시는 이 세상에 없는 시다. 내 시가 원하는 대로 나는 돼 버렸다.
(중략)
내 시가 나를 배반할 것을 안다.
(중략)
나는 인제 착하게, 착하게만 살아도 되겠구나.
 

-「詩魔 -黑碑」 일부

「詩魔 -黑碑」에서는 시의 탄생부터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는 시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개인적인 의견을 나름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진정한 시는 죽음으로써 써진다는 그의 생각은 이 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태어나면서 죽음의 문법을 함께 배워가야 하는 지구에서 시는 구역질나게 아름다운 이름이다. 그런데 죽음의 문법을 배운 시는 좀처럼 죽어지지 않는다. 죽을 것 같은데 절대 죽지 않고, 미칠 것 같은데 절대 미치치 않는 ‘恐慌’에 시달린다. 이러한 ‘恐慌’은 ‘冬至’와 ‘同志’, 그리고 ‘性女’와 ‘聖女’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게 하고 ‘그래서 부족한 것이 시라는 물질!’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시인은 그 비밀을 들여다보기 위해 문밖에서 서성거리는 자인 것이다.(「詩魔-黑碑」) 시는 천수천안관음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를 쓰는 시인은 눈이 한 개 밖에 없어 시가 보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이처럼 시인의 태생적인 부족함은 모든 시편을 병들게 하고, 그 때문에 시인은 여전히 부둣가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결국 시로써 자신을 염하고 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자살을 해가며 시를 쓰고, 그렇게 자신을 버림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기억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기억이 없어질 때까지 죽음의 시는 써질 것이므로. 이렇게 시는 죽었다. 하지만 시는 다시 부활한다. 그런데 시의 부활은 영광스러운, 그래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를 맞이하려 열어줄 대분이 없는, 쓸쓸한 부활이다. 죽음을 경험했건만 여전히 뜻대로 시가 써지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완성의 시는 없고, 모든 시는 실험에 불과했다. 시인은 이 세상에 없는 시를 쓰고 싶어했지만 반대로 그 자신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돼 버렸다. 그렇게 시가 시인을 배신할 것임을 스스로 안다. 하지만 시는 시인을 기억할 것이고, 그렇게 시인은 시와 함께 인제 착하게, 착하게만 살아도 되겠다고 말한다.

『게임광』과 『詩魔』를 읽으면서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어렵다고 느꼈고, 답답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롭게 밝혀지는 그의 시들에는 그만큼 오랜 그의 고민이 묻어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을 걸로 예상됐던 『詩魔』의 시들이 마지막 우주게임에서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생각에 미쳤을 때, 『詩魔』 전체는 바로 한 편의 시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인이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유서일지 모르는 이 많은 글자를 남긴 이유는? 답은 각자에게 있다는 비겁하고도, 당찬 생각이 해본다. 김영산의 시들이 어려운 것은 ‘시’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시와 함께 태어나고, 젊고, 늙고, 병들고, 죽고, 다시 부활했듯이 그렇게 ‘늘 함께’ 였듯이 나도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한다. ‘詩魔’라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결심이 내 삶의 곳곳에까지 작용하도록 스스로를 끊임없이 깨우는 힘이 아닐까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혼불을 쓴 최명희 작가는 일필휘지 보다 천필만필의 다듬어진 힘을 믿는다 했다. 내 가능성은 이것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를 내보일 수 있는 길은 이것 뿐이므로, 천필만필의 숙고와 진중과 그 힘을, 그 의미를 내 스스로에게 보이는 것, 그것이 내 ‘詩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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