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은 괜찮아요 창비시선 287
차창룡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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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향살이(여행자)

우리는 타향살이라는 말이 무색한 시대에 살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몇 번이고 그리운 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차창룡의 시를 읽으며 마음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다. 이는 무엇은 의미할까? 우리 모두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어딘가에서 떠나온 존재이며 떠돌아다니는 존재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완벽히 우리를 지켜주던 엄마의 몸과 따로 떨어지는 분리를 겪는다. 엄마와의 분리는 아기가 원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되었을 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이는 너무 근원적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엄마와의 분리 이외에도 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그리고 원했거나 원하지 않았던 '떠남'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차창룡의 시에는 이러한 떠나온 자 혹은 떠돌아다니는 자의 정서가 잘 드러난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중략)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산다
가족들을 잊기 위해 산다
가족들을 잊지 못해 산다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기 위해 산다
헤어짐이란 고시와도 같은 것
나는 날마다 고시공부하듯 결별의 책을 읽는다
(하략)
 

-「고시원에서」 일부

  고시원은 더 이상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단지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곳이다. 그 사람들은 가족들과 헤어져 가족들을 잊기 위해, 가족들을 잊지 못해 그 곳에서 살고 있다. 차창룡은 가족들과 헤어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시원이라는 소외된 공간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선원의 선승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오직 혼자이지요
홀로 존귀한 최고의 선승들입니다
108개의 선방에는 선승이 꼭 한명씩만 들어갈 수 있어요
여느 선방과 달리 방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습니다
(중략)
이곳은 외국인을 위한 선원인 것이지요
(중략)
괜찮습니다 참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니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불이 나도 괜찮아요
(중략)
서로 간섭하지 않는 미덕이 습관이 되어
나와 직접 관계되지 않은 일에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하략)
 

-「고시원은 괜찮아요」 일부


  이 시는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시원에는 살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금지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밥을 먹는다. 말은커녕 입도 벌리지 않은 채 밥을 먹고, 항상 만원인 화장실 때문에 배설의 욕망마저 참아야 한다. 그런데 시인은 만원인 화장실 때문에 배설하고자 하는 욕망을 참는 것, 이를 수행이라고 표현한다. 최소한의 인간적인 생활과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모든 걸 참아내야만 하는 상황을 수행이라고 한 것이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심지어 불이 나도 괜찮은 곳이 있을까? 아니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괜찮을 수 밖에 없는 곳, 참을만 해서가 아니라 참아낼 수 밖에 없는 곳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사람들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 미덕이 습관이 되어 자신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철저히 타자인 관계, 이들은 완벽이 남이 되어 살고 있다. 이러한 비정한 현실을 '괜찮다'고 말함으로써 정말이지 괜찮지 않음을, 도무지 괜찮을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여 관찰할 뿐, 어떠한 주장도 내세우지 않는다.

저 한없는 거부의 유연함
걷혀 있기 싫다고 끊임없이
유리벽을 들이받으나
워낙 부드러워서 자해하지도 못하는 저
물렁물렁한 것이 어찌 정력제가 된단 말이오
(중략)
들여다보고 있으니 자꾸 눈물이 난다
(중략)
비폭력의 저항을 굳게 믿은 적 있었던가
무저항의 저항이야말로
진짜 힘이라고 목청껏 외친 적 있었던가
(하략)
 

-「미꾸라지」 일부

  미꾸라지는 자신의 몸이 가루가 되어서도, 매콤한 국물이 되어서도 강한 저항을 하지 않는다. 워낙 부드러워서 자해하지도 못하는 물렁물렁한 몸이 정력제가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힘도 못써보고 죽는 것이다. 하지만 차창룡은 이러한 미꾸라지를 무기력하다거나 힘없는 존재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의 눈에 비친 미꾸라지는 갇혀 있기 싫음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한없이 유연하지만 끝까지 거부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미꾸라지에게서 그는 비폭력의 저항, 무저항의 저항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는 차창룡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지만 섣불리 주장하지 않는 그의 태도와 미꾸라지의 무저항의 저항은 같은 궤에 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들에서 드러난 '떠남'의 정서는 위의 내용들, 즉 고향을 떠난 사람들, 고국을 떠난 사람들에서 국한되지 않고 더욱 확장된다. 
 

천수만에는 여행중인 새들
게스트하우스는 연일 만원이다
여행중에는 항상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을
평생 역마살이 낀 새들은 알고 있는 것일까
(중략)
아직도 여행중이시오 물으면
고단한 새들을 태우고 간월암은 바다 가운데로 들어간다
 

-「긴 여행」 일부

  이 시에서 화자는 공간의 이동으로 인한 떠남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떠남'의 의미는 삶 전체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러한 이해는 결국 우리의 삶 자체가 '여행'이라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차창룡의 이러한 인식이 노마드의 개념에 닿아있음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마드(nomad)는 프랑스어로 유목민, 유랑인을 뜻한다. 들뢰즈는 노마드를 단지 공간의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이 어디든 특정한 가치와 삶에 집착하지 않고 언제나 창조적으로 변화시켜나가는 의식과 행위'라고 정의했다. 이 시에서 화자는 간월암에게 '아직도 여행중이시오'라고 물었지만 사실 이 물음은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과 다르지 않다.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우리는 미처 여행이라 인식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여행자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머물 곳이 확실하게 있으면서도, 삶을 정의 해 놓은 위인들의 문구 앞에서도 매번 헤매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내가 있는 이곳은 내가 있는 이곳이고
네가 있는 그곳은 네가 있는 그곳인데
모른다니 그곳이 그곳이고 이곳이 이곳인데
(하략)
 

-「나는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몰라」 일부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고, 네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인식은 결국엔 내가 있는 이곳은 내가 있는 이곳이고, 네가 있는 그곳은 네가 있는 그곳이라는 설명 외엔 다른 어떠한 것도 의미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2. 윤회
  인간의 소외된 공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고민했다는 차창룡의 말처럼 그의 시에는 인간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또 그런 것들 속에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차창룡이 선택한 방법이 미꾸라지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무저항의 저항, 비폭력의 저항을 보여주는 그의 시에서 우리는 '윤회'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1
돌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듯이, 입을 꼭 다물 뿐만 아니라, 귀까지 열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돌은 흙의 자식인가, 바위의 자식인가? 흙이 굳어져서 만들어지니 흙의 자식이고, 바위가 부서져서 만들어지니 바위의 자식이다.
(중략)
돌은 다시 부서져 흙이 된다. 흙이 이젠 돌의 자식이다.
(중략)
5
돌은 사실 쉼없이 입을 여닫고 있다.
(중략)
돌은 세상의 온갖 말을 듣고 있다.
 

-「희귀한 자연석을 모아서 집안에 두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여기서 돌은 바위의 자식인가? 아니면 흙의 자식? 아니, 흙이 돌의 자식인가? 알 수 없다. 바위에서 깨져나온 것이 돌이고, 이 돌은 흙이 굳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리하여 돌은 바위와 흙의 자식이다. 그런데 돌이 부서져 다시 흙이 된다. 이렇게 흙은 돌의 자식이 된다. 이렇듯 돌은 바위가 되었다가, 흙이 되었다가, 다시 돌이 된다. 이처럼 어디가 시작인지, 어디가 끝인지를 알 수 없이 돌은 이 모든 존재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돌의 속성 또한 분명히 규정할 수 없다. 돌은 입을 꼭 다물고 있어 몸뚱어리에 바늘 하나도 꽂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쉼없이 입을 여닫고 있다. 너무나 많은 입이 있어서, 그 수없는 입을 아무리 벌려도 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 결국 아무도 볼 수 없기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구도 들을 수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을 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입을 벌려 말하고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누구도 들을 수 없고 들을 필요도 없는 말을 왜 수없이 하는 것인가? 유용성만을 강조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돌의 행동은 자칫 아무 의미 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 잘못된 현실에 대해 스스로에게 쉼없이 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 차창룡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돌이 흙이 되었다가, 바위가 되었다가, 다시 돌이 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돌의 윤회는 단순히 지루한 일상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무는 것, 그것이 무너져야 만이 펼쳐지는 화엄 만다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차창룡은 세상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상처투성이의 세상 속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이며,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노래함으로써 세상을 보듬는다. 이러한 점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불교적 색채와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엔 온갖 치부를 보듬고 사랑하는 모습에서 출가하여 불도에 정진한 그의 행보를 미리 예상했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시들은 어느 것 하나 규정하지 않고 그 순간의 모습을 자유롭게 말하고 있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지만 사람을 비롯한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세상, 이것이 불가의 열반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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