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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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하루키가 완전히 변해 버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낀다

언젠가부턴가 하루키는 웃음소리를 소거하고 지적 문장으로 행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도쿄  기담집에서부터는 완연히 사건의 줄거리가 부각되지 않는다

심리에 관한 고찰이 주를 이루고 미묘한 주고 받는 상대와의 심리적 얽힘보다는 단독자로서의 한 개인 즉 화자인 나 또는 그(녀)의 자신을 독백하는 분석이 모든 것을 향해 결말이야 있든 없든 달려가며 완성된다

비록 여전히 장편소설인 해변의 카프카나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사건이 펼져지지만 그 사건들은 사회적 현실과는 무관한 한 개인의(아무리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내면의 특수한 풍경이다

 

이제는 음식도 그다지 이 소설집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유머는 1~2%나 등장할까 그것도 유머라기 보다는 하루키 특유의 엉뚱한 참신함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흰 색이 회색을 거쳐 검정색이 되듯 완전히 달라지고 만 그의 작품에 여전히 베스트셀러 1위 2위의 팬덤이 공고하게 진행되고 있는 건 기이하고 쉽게 이해될 상황이 아니다

아무리 전작에서 팬이 되어 좋아하기 시작한 총애하는 여배우라도 도중의 각각의 실패작들에는 미지근한 온도로 반응하는 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하루키가 달라지고 변해버려도 여전히 그가 탑의 작가라는 건 그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천부적이라고 하면 과장이고 그럼에도 특수한 본질로서의 매력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하루키는 그의 문학이 패스트푸드냐 마약같은 명작이냐 사이에서 늘 논란이 되겠지만

그런 그의 특질 중에 하나는 언젠가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저녁 안개 같은 신비한 의식 너머의 불가사의이다

그의 문학이 햄버거 같은 서구 지향의 현대 트렌디물임에도 늘 질리지 않고 찾는 사람들 중의 일부는 아마도 그가 놀랍게도 예상과 다르게 초자연적인 인간의 신비에 경도된 걸 보고 의식적이든 자각하지 못하든 마음이 빠져들었으리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단순히 개그맨인 줄 알았는데 명상음악으로 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이 모르는 자연의 깊고 먼 곳을 탐구하는 것을 보고 놀라는 개그 좋아하는 팬처럼

 

사랑에 대해 늘 필요한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일주일에 한 두 번 날짜를 정해두고 만나 섹스를 하고 함께 몇 시간을 보내고 가볍게 헤어지는 그런 충족으로서의 묘사와 인식밖에 하지 못하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이 소설집에서는 사랑이 존재의 전 증명인 레종 데트르 - 존재의 이유라는 불어 -로 작용한다

기 보다는 가식이나 퍼포먼스가 아니라 정말로 사랑에 모든 것을 올인하고 그 사랑 때문에 붕괴하는 세계의 멸망을 겪는 남자를 그리고 있다

사랑이 없어진 그렇다 존재했는데 없어진 남자들의 슬픔의 일곱 가지 빛깔을 그려낸다

유일하게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결말이 비극이 아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잠자로 변한 주인공은 비참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잠자라는 단편이 거슬렸고 전체 음악 속에 이질적인 부분처럼 이 책의 다른 작품과 겉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에 배어 있는 간절한 아픔은 상당하다

개인적으로 하루키는 근래 여자와 이별한 일도 없고 부인과 이혼도 안 했고 평온하다(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루키의 스캔들은 전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러브스토리는 실제 사례를 들었다고 해서 상상력을 덧붙혀 문장을 발라 만들어낼 수 있는 차원이 아닌 통절한 이야기들이다

담담하고 천천히 절제하고 잘라내고 건너뛰다가 어떨 때는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지시하면서 표현하는 고심참담한 구절들은 그가 얼마나 노고를 기울여 공감했을지 이 소설의 창작 때의 마음이 들여다 보인다

예컨대 사랑을 믿지 않는 하루키가 1Q84 때부터 서서히 변하더니 이제는 순정의 파멸로 인한 존재 속의 상실 그 한없이 우두컴컴하고 깊은 밑바닥을 보여준다

사랑은 그토록 깊은데 닿을 수 없고 누구도 자신의 여자를 이해할 수 없다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차 있고 그 세계의 일부인 여자는 외적 내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여자는 각 남자들에게는 세계 전체와 마찬가지이고 사랑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이해라는 강물 양 편에서 남자는 여자는 시간의 배를 타고 와서 만나고 기약 없는 사랑을 하고 그리고 다시 강물 양쪽으로 서로 떨어진다

시간은 견고하게 그녀를 데려가고 남겨진 남자는 자신 속에 무너진 여자의 크기를 발견하고 그 흔적의 폐허 속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애도도 위로도 재건도 방향 전환도 불가능하다

오직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쓸쓸한 지옥의 상실감만이 존재하고 이 존재감은 그 남자들을 그토록 짓눌려 부수지만 그럼에도 남자들은 도망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여자 없는 남자들은 사랑이 없는 세상에선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존재 없는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대체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계속 삶의 형태는 유지되지만 이미 삶의 내부 에는 그 남자들은 없다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집은 무에 가까와진 남자들의 회상이다 그 회상은 아프고 그럼으로 길게 영원히 이어진다

이 회상의 미로에서는 어느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죽음이 조금씩 다가와 시간의 바람 속에서 닳아 먼지가 되기 전까지 이 회상의 기억들은 앙코르와트처럼 비록 나무들이 뒤덮더라도 언제까지나 그 끔찍한 위용의 거대한 존재감으로 그를 흡입하고 짜낼 것이다

그의 의식에서 고통이 한 방울까지 남아 있지 않아도 이 회상들은 가능할 때까지 그 남자들의 피를 흡혈할 것이다

여자들은 그 남자들에게는 뱀파이이인데 남자들은 그 뱀파이어가 없으면 그들도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그 뱀파이어에게 침몰한다

사랑이 원래 혼돈이라는 걸 이 소설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혼돈 속에서 출구도 없고 승천도 없이 남자들은 지하로 스며들고 여자들은 자꾸만 사라진다 생활 속에서 그의 거리안에서 그리고 세계 안에서

 

이제는 노년의 길목을 돌아 희망과 낙보다는 존재의 기원과 모순의 비밀을 말하려고 했던 하루키는 공존하는 남녀 까지는 아직 모른다 (그건 나도 당연히 모른다 건방지게도 이런 말을 하지만)

아마도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하루키는 남녀의 사랑이 결합된 세계의 허황됨을 섣불리 믿으려는 미래의 소설은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세상이 간직한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부분을 언제부터인가 늘 예민하게 자각했던 하루키는 그 비밀스러운 미지가 남자와 여자 사이 틈새에 걸쳐져 있다고 이 소설에서 묘사했다

그리고 그 남자들의 사랑은 간절하고 극진하게 전 존재를 건다 때로는 여자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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