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 문학의 세력이 대세이다 서점은 온통 일본 문학으로 채워져 있다 너도 나도 일본 문학을 읽는다 추리가 그 중 강세인 것 같고 추리이외에도 일본 문학이라면 덮어 놓고 읽는 것 같다 범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일본 문학이라면 작가에 상관없이 수입해와 번역하고 있다 이런 일본 문학의 약진 속에서 중국 문학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다 위화를 위시해서 모옌 그리고 텐닝,쑤퉁,옌롄커등이 소개되고 있다 그 중 한 작가인 둥시의 작품도 들어왔다 이번 둥시의 책은 표제작 언어없는 생활을 필두로 5편의 중편이 담긴 책이다 둥시의 작품을 다 읽고 난 총평은 중국 문학이 가진 어떤 원초적이면서도 투박하지만 살아 있는 힘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정점으로 보다 도시적이고 서구적인 생활을 직조하는 일본 소설과는 다른 농민적이고 서민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어떤 고유함을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인간의 악함을 저변에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위악성을 기조로 하여 삶에 있어서 잡히지 않는 행복과 소통 그리고 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는 둥시의 소설은 간결하면서도 해학이 있고 사실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인공성이 있으며 전통적인 세계에 속하면서도 인간 본연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작가의 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었다 작가의 의중을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나는 이 소설들을 흥미있고 재미있게 소설 본래의 즐거움을 느끼며 따라갔다 때로 작가가 던져 놓은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생각에 잠기기도 하면서 중국 대륙의 드넓은 역사에 축적된 풍부한 인간사의 다양함에 빨려 들듯이 동화되었다 때에 따라서는 비약과 반전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낄 때도 있었고 도에 넘치게 위악적이어서 놀라기도 했으며 유치하다고 느낀 부분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노신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 대륙은 정말 인간들 속에서의 이야기가 풍부하고 넘쳐나서 소재가 너무 많구나하고 동일한 감흥을 느끼게 되었다 말하자면 사람사는 이야기의 끊이지 않은 다채로움이 한국 문학에 비해 더 높았다고 할 수 있었다 둥시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은 결여된 시점이었다 무엇이 결여되어 있거나 결핍되어 있거나 상실해 가는 그런 구조였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닫힌 채로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고 고립되며 죽어가거나 절망하고 끊임없이 상실해가는 것이다 그런 작가의 안배에 따라 극중 주인공들은 모두 고통을 입고 무언가르 잃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중국의 현대사가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둥시의 작품들 역시 아프고 절망하며 괴뇌하고 있었다 역시 세상이란 고통과 절망이 일상사인 것인가 [언어 없는 생활] 귀머거리 아들과 장님이 된 아버지와 벙어리인 며느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결여되고 결핍된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지난하고 어려운 삶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이들 식구들을 이상하고 색다르게 여길 뿐 위로해 주거나 불쌍히 돌봐주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서로 도우며 겨우 살아가는 이 이야기에서 인정의 따뜻함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끼리 도우며 살아가는 모습에서도 훈훈함이나 장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애처롭고 고생스러울 뿐이다 작가인 둥시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상의 본래 모습이고 인정이나 이웃들의 도움 같은 것은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장애인들의 모습이 보는 사람들을 안쓰럽게 했다 [느리게 성장하기] 역시나 이 소설에서도 정상적이지 못한 장애인의 등장이 또 이어진다 결핍된 자아로 인해 세상을 비뚤게 살아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서 왜곡되고 비뚤어진 세상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의 이름이 마영웅의 줄임말인 마웅이라느 데서 역설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을 영웅으로 보는 작가의 독특한 시각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것도 다 세상이 원래 그래서 그런 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 같다 그러나 뭐라 해도 마웅은 실패한 사람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승부를 거는 편법을 쓰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들 인간 사회의 일그러진 거울이 바로 마웅이었다 [살인자의 동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이 많이 아팠던 소설이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는 도덕과 법률을 무시하는 모습에서 위대하다고 해야 할지 비인간적이고 비양심적이라고 해야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던 소설이었다 어머니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통도 감수하고 무슨 일이든 한다는 그 어머니의 모성애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의 모랄과 충돌하는 그 모순이 읽는 동안 계속 가슴에 걸리적거리고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머니들은 정말로 가엾다 자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음란한 마을] 독창적인 알레고리로 읽혀야 할 그러니까 우화로 읽혀야 할 소설인데 나는 이 소설이 인간 사회 전체를 그런 시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슴이 아팠다 인간 세상이란 정말로 하나의 거대한 창녀촌이 아닐까 아무리 멋진 옷을 입고 아무리 예의 도덕으로 치장을 하고 가식으로 살아가도 본래의 욕망과 욕정을 어쩌지 못해 그 욕정의 노예가 되어 돈이라면 무슨 일이든 저지르는 지옥도가 바로 인간세계가 아닐까 하는 서글픈 생각에 빠지곤 했다 작가가 보는 것처럼 인간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창녀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창녀촌에 사는 것 같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던 소설 [시선을 멀리 던지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의 팔자는 남자 만나기 나름이란 자명한 그러나 맥빠지는 이치를 다시 느끼게 한 소설이었다 게으르고 여자에게 횡포를 부리는 못난 남편 때문에 점 점 침몰해가는 여자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주변에 그런 실제 사례가 있을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여자의 마지막 삶의 희망인 아들마저 잃어버린다는 대목에 이르게 되면 읽는이의 고통이 극에 달하게 된다 여자는 마침내 아들마저도 잃고 단지 자신의 처지를 명약관화하게 자각하는 것에서 끝이 난다 출구는 없다 해답을 제시해줄 사람도 없다 오직 상실만이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의 삶이란 공허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