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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은 말한다 -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구본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가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았고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삶에는 참 길이 많은 거 같다.
내가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될수록 '길은 하나다'라는 어린 시각에서 많이 벗어난다.
어릴 적에는 하나밖에 없었다.
가야할 곳 한 곳, 되어야할 목표도 오직 하나였다. 그것만이 전부인 세상이었는데 진짜 세상은 그렇지 않다.
길은 사방으로 뻗어있었다.
이 저자도 본업은 검사인데 지금은 책의 저자다. 이력이 재미있고 그 열정이 멋지다.
수집이라는 게 본문에 나온 말처럼 사치, 돈, 투자 이런 선입견을 갖게 하지만 저자에게는 '의미를 창조하는 일'이다.
수집을 좋아해서 글씨, 즉 간찰 수집가가 되었고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였다. 하지만 소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해 스스로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다. 진품여부의 판별, 작품의 가치를 가늠하는 안목 등 전문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삼고 자료를 읽고 연구한다. 글씨 수집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싶은 대목이었다. 이런 열정과 노력은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유묵은 말한다'는 말처럼 유묵의 종이, 인장, 글씨체, 내용, 작성연대, 출처, 함께 나온 물건 등과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진품여부를 알아야 하기에 공부는 말 그대로 기본바탕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를 여기서도 만난다.
저자는 초서를 해독하기 위해 [칠제대자전]을 보고 전각 사전 [ 오체전서자전]을 본다.
정말 웬만한 전문가보다 나은 전문가로 보인다. 전반적인 지식인은 많은데 뼛속까지 전문가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라는 내용이 본문에 보이다. 정확한 감식안을 위해서는 '실력'을 키울 수 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간찰은 일상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현대인들보다 훨씬 가난하고 지식도 부족하고 소일거리도 많지 않았지만, 옛 사람들의 감성만은 주옥같이 아름답다.
삶의 희로애락을 잔잔히 써 내려간 글들은 그야말로 일상의 철학을 담고 있다. - p ,190
간찰은 선인들의 정신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선인들이 주고받던 편지로서 시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이야기와 문장들, 전쟁 중의 비밀서신 등이 담겨있다. 간찰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나도 흡족할 만큼 마음에 들었다.
서예 작품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이지만 간찰에서 보여주는 삶의 향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글씨를 볼 줄 모르는데 이 책을 통해서 내가 '글씨'를 좋아하는 걸 깨달았다. 전혀 기준도 없는데 본문에 삽입된 글씨들을 보며 마음에 드는 글씨를 찍기도 했다. 그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안중근' 선생님과 '김구' 선생님의 글이었다.
글씨는 곧 사람이다. 필적은 뇌의 흔적이다. 그래서 습관화되어 무의식 중에 나타난다는 것과 사람마다 특유의 패턴이 있다고 한다.
필적학이란 글씨를 보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글씨 쓸 때의 기분, 의도, 지능지수, 나이 등을 알아내는 학문분야이다. 범죄수사에도 활용하는 것이 필적학이다. 필적을 분석하면 그 사람의 내면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필적학에서는 글자의 크기, 형태, 압력, 속도, 기울기, 정돈성, 전체적인 인상, 자연스러움, 조화, 리듬 등을 살핀다. 미국에서는 필적심리학이 광범위하게 수사에 활용된다.
저자는 글씨 공부를 했다. 좋은 글씨를 수집하고, 제대로 감상하고, 항일운동가와 친일파의 필체를 구분하기 위해서 필적학과 필적 심리에 대해 공부했다.
저자 덕분에 나도 필적학에 대한 개념과 의미를 배웠다. 더욱이 글씨체의 중요성까지 말이다. 글씨를 보면 성격이 보인다는데, 그럼 내가 쓴 글씨로 내 내면이 보인다는 걸까. 전문가가 있다면 한번 들어보고 싶기도 하다. 아니 저자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 기회가 꼭 닿기를. 그동안 난 글씨 연습이나 해야겠다.
이런 정보 등을 통해 글씨 크기, 글씨 형태, 곧은 글씨와 굽은 글씨, 글자 간격,
행 간격, 규칙성, 글씨 속도, 정돈성 등에 따라 필적이 말해주는 인물의 유형을 나누었다. 그 결과가 항일운동가와 친일파다.
글씨체로 항일운동가와 친일파가 이렇게 유형이 나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또 다른 학문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더불어 내가 쓰는 서명, 글씨체에도 더 관심이 많아졌다.
"필적은 말한다"
제목이 좋고. 내용과 구성 또한 아주 만족한다.
내용의 신선도가 아주 크다. 글씨체를 통해 항일운동가와 친일파를 구별한다.
글씨는 말 그래도 개성인데 이것이 유형화가 되고 변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내 궁금증을 잘 풀어주었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해줘서 고마웠고 나를 돌아보게 계기가 되어 좋았다.
나는 연필을 아주 좋아한다. 지금도 4B연필은 미리미리 사놓을 정도이다. 그렇게 종이에 대고 쓰는 것을 즐기는 나도 자판을 이용하는 횟수가 훨씬 많고 높다. 오늘은 부쩍 연필과 종이가 애틋해진다.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배경지식을 쌓았다. 특히나 역사적 지식에서는 더 큰 수확이었다.
그림은 전성기 때 작품을 최고로 치지만 글씨는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글씨를 최고로 친다는 것. 이를 '절필'이라고 한다.
사람의 인격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고 해서 높은 가치를 매긴다.
천초는 다른 사람에게 대필시키는 것을 말한다.
무엇보다 기억에 많이 남는 것은 글이다.
그 시대 속에서 온몸을 불사르며 자신을 태우며 살다간 항일지사와 남을 불사지르며 살아간 친일파의 글.
글귀 속에 살아 숨쉬는 그때의 영혼들의 울림이 오랜 시간이 지나 지금 내 안에서 울려온다.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잊고 살지만 가끔은 우리의 지금을 있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기억해줘야한다.
그것이 지금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지 않을까 한다.
의병장 의암 유인석이 면암 최익현에게 보낸 간찰 내용은 절절함 그 자체다. 살아서 돌아올 것으로 충심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다. 면암은 이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간찰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눈물 겨운 삶의 행로가 가득 담겨있다. 더불어 세상의 아이러니도 한껏 보여준다.
조선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나 형무소에서 무참히 죽어가던 시기에 한편에서는 만찬을 벌인 자들도 있다.
여규형은 일본간부 방야옥을 만찬을 빛내달라고 초대하고 있다. 한 사람만 초대장을 보낸 게 아니었다. 많은 선비들이 자결로 일제 침탈을 항거하던 시기에 한쪽에서는 놀자먹자판이었다.
친일에도 나름의 고뇌가 있었을까 면죄부를 주려는 마음이 일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에서 처절하게 저항하고 죽어간 항일지사를 보면 그런 마음은 싹 가신다.
황현 선생이 [매천야록]에 서술했다.
여규형과 정만조를 "제주와 학문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개화 이후 외세에 아부하며 쫓아다니기를 미처 따르지 못할까 걱정하는 듯이 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들을 침 뱉고 욕하였다"
서슬 퍼런 지적이 너무나 시원하다.
항일지사 이종혁의 옥중 편지. 읽으면서 진심으로 웃었다. 그 호방함이 그 암울한 상황에서도 놀랍고 대단하다.
이준 열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검사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준 열사는 헤이트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결국 무산되어 네델란드 한 호텔에서 병사했다. 특히나 이 분의 글씨는 검사인 저자에게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을 거라 짐작이 된다.
웃긴 건 을사오적 중 하나인 권중현의 간찰에서 '이준열사의 가족들을 염탐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을사오적은 죽어서 도대체 어디를 갔을까.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그 죄값을 죽어서라도 받아야하는 거 아닐까.
이외에도 참 많은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 책이라 이것저것 적어두고 싶은데 - 짧은 내 기억력을 믿을 수 없으니 - 그럼 너무 길고, 이야기가 많으니 내가 더 하지 못한 말들은 책 속에서 꼭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면 한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공부했던 '혈의누'의 이인직. 이 인물이 이완용의 비서인 줄 진정 몰랐었다.
막후에서 일제의 조선 강점(경술국치)에 큰 공을 세운 친일지식인임을 제대로 확인했다.
친일파인 줄은 알았지만 이완용의 비서였다니. 세상에나.
이인직은 모르는 사람이 많으니 이거 소문 좀 많이 냈으면 좋겠다. 이완용만큼이나 나쁜 놈인데. 모른다는 게 억울하다.
내게도 공부가 많이 된 책이었다. 잘 읽었고 저는 기쁜 마음으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