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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재주라서 미안합니다 - 심쿵 아재 불출 씨의 박하 맛 일상 탐구
윤태영 지음, 윤혜상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불출 씨의 불출(不出)하지 않은 자기 고백
「아는 게 재주라서 미안합니다 - 심쿵 아재 불출 씨의 박하 맛 일상 탐구」 서평
저자 윤태영은 때로는 고스트라이터(ghostwriter), 때로는 기록자로 살아온 삶을 서문에서 적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대변인, 부속실장과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낸 화려한 이력은 ‘한 시대를 정치권에서 살았지만 세상에 대한 통찰은 남다를 것 없이 그저 평범하다’ 는 한 줄로 겸손하게 갈음한다. 대통령의 복심, 말과 글의 관찰자에서부터 장편소설의 작가라는 반환점을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독자들이 궁금해 마지않던 사람 윤태영 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별거 없는, 그러나 녹록치 않은 세상을 대하는 아재 ‘불출’ 씨의 다섯 가지 심쿵 마인드. 윤태영의 에세이 「아는 게 재주라서 미안합니다」 는 주인공 불출 씨를 통해 너무 달지도, 마냥 쓰지만은 않은 그의 인생을 알싸한 박하 맛으로 녹여내고 있다.
불출 씨는 소박하면서도 계산적이며, 우유부단하지만 인정 많은 사람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시민이며, 최고의 소심(小心)인 이기도 하다. 일관되게 살라는 사람들의 충고에는 “지금껏 우왕좌왕으로 인생을 일관되게 살아왔다” 며 자부한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명언 만들기에 골몰하고, 문상 가는 길에서는 왕복 요금과 부의금을 남몰래 셈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길 고양이에게 마음이 쓰이는 일이 ‘길들여진다는 것 혹은 익숙해진다는 것에는 그만큼의 기쁨과 슬픔이 뒤따른다는 것’ 이라 넌지시 일러준다. 거창한 아포리즘 대신 하찮음이 만든, 그러나 귀중한 일상을 한 줄 단문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삶을 엄격한 잣대로 가늠하지 않는다. 깊은 성찰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부족한 대로 이 세상을 버티어 준 존재’ 만으로 고마운 불출 씨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은 닫혀 있고, 우유 투입구는 용접되어 있습니다.
바깥의 기척 탓인지 대문마다 긴장이 서려 있습니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강아지들만이 사납게 짖어댑니다.
그 시절의 냄새도 없고 그 시절의 대화도 없습니다.
사람을 마주치게 될까봐 오히려 두렵습니다.
웃음도 눈물도 싸움도 없는, 혼자만의 공간입니다. (옛날의 골목과 오늘의 계단 中)
고장 난 승강기덕에 10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고 있는 불출 씨의 상념이다. 에피소드 한 편마다의 모든 문장은 단문을 사용했다. 한 문장이 한 줄을 넘지 않는다. 명확히 대비되는 사물은 모순된 세상을 드러내는데 충분하다. 담담한 묘사는 불출 씨의 외로움을 표현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단문의 힘이고 대구의 효과이다. 윤태영의 문체, 윤태영의 리듬이 주는 ‘아재미’ 는 그래서 더욱 담박하다. 저자는 불출 씨의 일상을 빌어 친절하게도 글쓰기 노하우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늘 새로운 다짐을 되풀이하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는 일생, 여전히 살아갈 날들이 과제처럼 남은 중년의 단상, 특별히 잘 한 것도 특별히 못한 것도 없는, 나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없다고 오늘을 자평하는 불출 씨에게서 우리네 삶을 넌지시 투영해본다. 불편한 다리를 가진 산책길 오리 한 마리, 주말농장 귀퉁이에 싹을 틔운 땅콩 꼬투리, 바쁘게 거리를 오가며 무리 짓는 사람들의 기특하고도 고만고만한 일상을 담은 불출 씨의 불출(不出)하지 않은 자기 고백. 보잘 것 없고 시시한 것들이 일궈내는 인생 2막의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을 위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