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자의 세계 - 인체의 지식을 향한 위대한 5000년 여정
콜린 솔터 지음, 조은영 옮김 / 해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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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해부학 기록은 기원전 3000년경에 쓰여진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이다.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에 대한 치료법을 기술하고 있으며 주술이나 미신이 아닌 관찰과 실습에 기반을 둔 치료 중심의 철저한 실용서이다. 


고대 그리스의 알크마이온은 정맥을 따라 체액이 흐르고 있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체액의 균형을 유지해야한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주장했다. 흙, 공기, 불, 물로 이루어진 4체액설은 2000년 동안이나 의학계를 지배했다. 알크마이온보다 한 세기쯤 늦게 활동한 히포크라테스는 명실상부한 의학의 아버지이자 선구자로 그의 이름을 딴 히포크라테 선서는 최근까지도 의사의 실천 강령을 정의한다. 히포크라테스 추종자들에 의해 견인력을 얻은 개념인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 '프네우마(정기)'가 생명현상을 유지한다는 믿음 역시 오랫동안 희학계를 지배했다.


근대 의학의 선구자 칼레노스는 검투사들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몸속을 관찰할 기회를 얻었다. 그들의 상처를 '몸속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라고 묘사했다. 뛰어난 의학적 재능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부름을 받아 로마에서 활동하며 폭넓은 의학적, 철학적 주제를 룬 서적들을 유산으로 남겼다.  


중세에 들어서며 해부학은 철학에서 과학으로 발돋움한다. 15세기 유럽 볼로냐를 시작으로 점차 의과대학에서 인체 해부가 합법화 되었다. 사형된 죄수의 수는 한정적이었고, 의과대학 학생들은 직접 시신을 구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스승을 대신해 무덤을 판 네 명의 볼로냐대학교 학생이 기소 되었다. 지금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갈레노스의 권위에 맞서는 도전이 일어났으며 훨씬 자세하고 명료한 원근법으로 그려진 해부도가 등장한다.


해부학의 예술적, 의학적 걸작이 탄생한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해부학자는 신체기관과 기관계에 대한 과학적 진실을 추구했지만, 예술가들은 초상화의 진실성을 갈구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와 조각가들은 해부학이 인간의 겉모습에 미치는 영향에 더 관심을 보였다.'(p.126)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89년에 처음으로 두개골을 구입했고, 1507년에 인간의 몸을 해부했다. 다빈치는 왁스로 뇌실의 주형을 만들어, 전통적인 해부 지식과 달리 그 안에 체액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척추를 올바르게 연구했고, 골격의 근육에 사로잡혔다.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에서 자란 예술가 미켈란젤로 역시 해부학을 파고 들었다. 미켈란젤로의 해부학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설득력 있는 인체 묘사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해부학은 병과 죽음을 극복하려 했던 인류의 서사다. 고대 이집트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5000년 동안 해부학자의 서재를 지킨 150여 권의 책을 통해 해부학의 역사를 톺아볼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수놓았던 예술가들이 해부학에 열정적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이완, 수축된 근육들의 표현이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 텐데. 


<해부학자의 세계>를 읽는 내내 마음 한편에 부채감이 들었다. 차가운 슬레이트 위에서 사라져간 이들에게 빚을 졌구나. 사건, 사고 없이 안온한 하루를 보내고 이렇게 책을 기록하는 시간이 새로이 느껴진다.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큰 울림을 주는 책. 내일의 나를 잘 돌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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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하고 권력 있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과학의 발전을 내세우며 해부를 지지했다. 자신의 몸이 난도질당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업장에서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시신은 가족이 장례조차 치러줄 수 없는 빈곤한 사람의 것이었다. 해부학법의 예기치 않은 결과는 망자의 주검에 대한 굴욕스럽고 경멸적인 공개 해부를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만든 데 있었다. 해부는 더 이상 범죄에 대한 형벌이 아닌 가난한 죄에 대한 형벌이 되었다.'(p.326)

'당신이 이름 모를 시신 위에 허리를 숙이고 딱딱한 메스의 칼날을 들이댈 때, 그 몸은 두 영혼의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기억하라. 그는 그를 가슴으로부터 아끼고 보호한 사람의 믿음과 희망으로 키워졌다. 어린아이였을 때, 젊은이였을 때, 그는 당신과 같은 꿈을 꾸며 미소 지었다. 그는 사랑했고 사랑받았으며, 행복한 내일을 희망하고 소중히 여겼고, 먼저 떠난 이들을 그리워했다. 이제 그는 이 차가운 슬레이트 위에 그를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이 하나 없고, 기도해줄 이 하나 없이 누워 있다. 그의 이름은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나 거침없는 운명이 그에게 인류에게 봉사할 힘과 위대함을 주었음을 기억하라.'(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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