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프랜즌의 '자유' 주는 소설적 카타르시스 - 문장의 힘, 이야기의

 

새알밭 님의 블로그 포스팅 ( http://stalbert.tistory.com/248

 

부담감 - ‘자유’를 둘러싼 온갖 상찬들
 

조너선 프랜즌 (Jonathan Franzen)의 화제작 ‘자유’ (Freedom - A Novel)를 읽었다. 읽기 전부터 부담감이 컸던 책이다. 하지만 그 부담감에 576쪽에 이르는 분량은 들어 있지 않다. 부담감의 핵심은 그 책을 둘러싼 온갖 찬사와 논란, 특히 찬사 쪽에 있다. 수많은 언론, 문학평론가 들이 ‘걸작’이라고 외쳐댄 책. 온라인 시사잡지 ‘슬레이트’는 프랜즌을 ‘인터넷 시대의 톨스토이’ (The Tolstoy of the Internet Era)라고 추켜세웠고, 시사주간지 타임은 823일치 표지에 프랜즌을 올리고 ‘미국의 위대한 소설가’ (Great American Novelist)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 아래 부제는 이런 내용이다.

‘가장 돈이 많거나 유명한 것도 아니다. 그의 캐릭터들이 미스테리를 해결하거나 마법을 지녔거나 혹은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새 소설 ‘자유’에서, 조너선 프랜즌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준다.

‘오프라의 선택’

미 대중문화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낮 시간대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도 프랜즌 프렌지 (Franzen Frenzy, 프랜즌 열풍)에 동참했다. 아니, 화룡정점, 프랜즌 찬사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했다. 오프라가 그녀를 신처럼 떠받드는 시청자들에게, 프랜즌의 책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지 보자.

“내가 그렇게 느꼈듯이 여러분도 조너선 프랜즌의 ‘자유’가 지금까지 읽은 책중 최고라고 여기게 될 거예요. 이 책은 3대에 걸친 이야기를 담은 걸작입니다. 한편의 가족 서사시예요. 이 책은 모든 걸 담고 있어요. 섹스, 사랑, 심지어 락앤롤까지, 책에서 보고 싶은 모든 게 들어 있죠.

오프라의 승인은 2001년에 빚어졌던 둘 간의 갈등 때문에 더욱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프랜즌은 ‘The Corrections’라는 또다른 가족사 소설로 미 독서계에 돌풍을 일으켰고, 오프라도 그 책을 자기 프로그램의 추천 도서 - ‘오프라의 선택’ (Oprahs Pick) - 로 꼽고 프랜즌을 자기 토크쇼에 초대했다. 그런데 프랜즌이남성 독자들이오프라 북클럽 선정 도서 마크가 붙으면 남자들이 사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남성 독자들이 사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한 것이 와전되어 오프라 쇼 출연을 거부한 것으로 각종 언론에서 기사화하여, 오프라를 비롯한 오프라 교 신자들의 공분을 샀고, 프랜즌은 잘난 체하는 엘리트주의자, 속물 지식인으로 낙인 찍혔다. 그리하여, 그리고 뭇 대중도 당연히 ‘프랜즌은 이제 오프라한테 완전히 찍혔다’라고 생각했다. 올해 프랜즌의 신작을 오프라가 다시 추천 도서로 꼽은 데 대해 몇몇 언론이 ‘오프라, 프랜즌을 용서하다’라고 제목을 뽑은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대체 오프라가 어느 정도길래? 그 의문은, ‘오프라 추천’의 파급력을 보면 간단하게 풀린다. 미 출판계에 따르면 오프라의 추천을 받은 책은 보통 80~100만 권 ‘더’ 팔린다고 한다. 8만이나 10만 정도가 아니다. 그러니 숱한 작가들에게 오프라의 추천은 거의 신의 축복에 가깝다고 할 만하다. 아니나다를까 프랜즌의 책은 곧장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리스트의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오프라가 추천하지 않았어도 많이 팔렸을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오프라 덕에 ‘더 많이’ 팔렸고, 팔릴 거라는 추측이 더 신빙성 있다).

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도 ‘프랜즌 프렌지’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뉴욕타임스가 프랜즌의 ‘자유’를 걸작으로 상찬한 게, 다른 비평가와 몇몇 여류 소설가 들로부터 역풍을 받는 직접적 계기로 작용했다. 뉴욕타임스의 미치코 가쿠타니는 ‘불행으로 충만한 한 가족의 초월 꿈꾸기’ (A Family Full of Unhappiness, Hoping for Transcendence)라는 제목의 서평을 이렇게 시작한다.

‘조너선 프랜즌의 충격적인 새 소설 ‘자유’는 그의 능란한 문학적 기교 - 모든 필수적 이야기 솜씨에다 풍부한 부가적 장치들 - , 미국 중산층의 삶을 업다이크식 스타일로 활짝 열어 보여주는 수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가쿠타니는 자유가 그의 전작을 뛰어넘는 심도 깊은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은 다른 지식인들, 특히 프랜즌의 소설이 다루는 것과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여류 작가들에 의해 ‘여성 작가들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편견을 드러내는 한 증거’로 비판 받았다. 가령 조디 푸코 같은 작가도 위기의 가족을 여러 각도에서 심도 깊게 묘사했는데도 프랜즌이 받은 것과 같은 축복의 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논란은 그저 논란으로 끝날 뿐 어떤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코노미스트

짤막하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으로 유명한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웬만해서는 칭찬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좋다고 하면 꼭 좋지 않은 대목도 언급해 균형을 맞춘다. 그런데 프랜즌의 책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평 (The stuff of life)을 보고 책을 볼 생각을 하게 됐다. 마지막 대목을 인용한다.

‘딸이 다니는 대학에 들렀을 때, 패티는 ‘너의 자유를 선용하라’ (Use well thy freedom)라는 글이 새겨진 돌을 본다. 그러한 경고는 책 전체를 흐르는 메시지다. 당대의 사회상과 그 문제점을 잘 아우르면서, 결점 많은 주인공들이 그들 나름의 구원을 얻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자유’는 현대판 ‘실낙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제 내 생각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까지, 첫 한두 페이지만 서너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한두 페이지 읽다가는 ‘다음에...’ 하면서 좀더 손쉬운 추리소설로 발길을 돌렸다가, 며칠 뒤에 돌아와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하기를 몇 번 반복한 탓이다.

그러나 일단 10여 페이지가 넘어가고 프랜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자 독서에도 탄력이 붙었다. 앞에 인용한 타임지의 표현처럼 무슨 살인 사건이 나는 것도 아니고, 수수께끼의 미확인 비행물체가 나타나는 것도 아닌데도,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중산층 가족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펼쳐갈 뿐인데도, 프랜즌은 그 이야기에 적당한 위기감과 긴장감을 기막히게 곁들이면서 독자로 하여금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곧 뭔가 틀어질 듯한, 어딘가에 금이 가서 ‘쨍!’ 하고 균열이 나타날 듯한, 어느 지점에선가 폭발이 일어날 듯한, 뭔가 심각한 문제가 드러날 듯한, 그런 느낌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암시한다프랜즌의 문장은 여느 추리소설 문장에 비해 대체로 길고 에두르지만 결코 둔하지 않다. 민활하다. 맛깔스럽고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냉소적이며 때로는 무자비할 정도로 직설적이다. fuck’이라는 말이 숱하게 나오는데도 거부감도, 저급하다는 느낌도 주지 않는다. 도리어 그 이야기의 내용과 맥락상 그렇게 써야만 할 것 같은 필연감을 준다.

프랜즌의 내공은 실로 대단했다. 그 긴 소설을 어떻게 일관된 호흡과 템포와 깊이로 끝까지 끌고 가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줄거리를 얘기하라면 한 중산층 가족의 위기와 그 극복 (적응?) 과정, 이라는 한 마디로, 지극히 거칠게 요약할 수 있겠지만, 그런 요약만으로는 프랜즌의 소설이 갖는 힘과 메시지와 매력의 한 조각도 제대로 내보여줄 수가 없다.

오프라의 말마따나 프랜즌의 ‘자유’는 우리 보통 사람들이 갖는 거의 모든 문제를 다룬다. 결혼, 사랑, 섹스, 불륜, 우정, 부모 자녀 간의 갈등, 인종 차별, 환경 문제, 정치 문제, 사회 문제, 계급 갈등 등등 

프랜즌은 600쪽 가까운 긴 소설 속에, 이 모든 문제를 더없이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그것도 주인공인 월터-패티 부부와 그 친구/동료/연적인 리처드 카츠, 그리고 그 자녀들인 조이, 제시카의 행보를 묘사하는 가운데 거의 필연인 것처럼 드러내 보인다. 프랜즌이 펼쳐보이는 그들의 삶은 적나라하다. 그들 삶의 모든 부면이, 누추하고 때로 수치스럽기까지 하지만 결코 도외시할 수 없는 현실이, 프랜즌의 메스 같은 표현력에 의해 실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프랜즌이 묘사하는 주인공들의 성격은 더없이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다. 이른바 소설의 핵심 요소인 '성격 개발' 면에서, 프랜즌은 세 사람의, 평범하고 때로는 추레하기까지 하지만 끝내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를 독자에게 만들어 보여준다. 그들의 매력, 그들에게 갖는 호의, 혹은 악의, 혹은 기대와 실망이, 이 책을 이끌어가는 힘이고, 독자로 하여금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원천이다. 주인공들의 생각과 감정의 그 미묘한 결을 어쩌면 그처럼 세밀화처럼 그려보일 수 있는지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프랜즌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미국적인, 미국 역사와 정치와 사회가 낳은 산물이지만, 그들이 체험하는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방황과 고민은 대부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민망하고, 혼자 얼굴을 붉히거나, 혹시 옆에서 누가 보는 게 아닌가 곁눈질을 할 정도로 괜히 부끄러워지다가도, 그 속에서 인간성의 아름다움을 마법처럼 만나게 된다. 카타르시스다.

맨 마지막, 주인공 월터와 패티가 힘겹게 화해하는 장면에서 나는 특히 그런 마법적 카타르시스를 체험했다. 절창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프랜즌은 다만 몇 페이지에 걸쳐, 월터와 패티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재확인하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마침내 화해하는 장면을, 사랑, 용서, 화해, 이해 같은, 이미 그 효용을 잃어버린 허언들을 전혀 쓰지 않으면서, 간곡하고도 정밀하고 치열하게 묘사한다. 그 장면은, 내가 지난 몇년간 본 소설의 어떤 로맨스 장면보다 더 아름답고 절실하고 낭만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 장면이 하도 인상적이서, 나는 책을 끝낸 다음에도 그 대목으로 세 번인가 네 번 다시 돌아갔다
 

마무리

프랜즌의 ‘자유’가 걸작이냐 아니냐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가타부타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전문 소설가도, 전문 비평가도 아니므로 이 소설이 얼마나 잘 됐는지, 어떤 부분을 흠으로 지적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이같은 소설을, 이같은 독후감을 가능하면 더 자주 만나고 싶을 뿐이다한 가지 첨언할 것은 사놓고 - 물론 이 때도 뭇 언론의 찬사에 못이겨 - 지금까지 읽지 않은 프랜즌의 전작 ‘The Corrections’를 이제부터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점이다.

인상적으로 읽은 몇 대목 (특히 맨 마지막 인용은 두 주인공이 화해하는 끝 장면

---

There’s an unmarked door to nowhere
On the dark side of the bar
And all I ever wanted was
To be lost in space with you
The reports of our demise
Pursue us through the vacuum
We took a wrong turn at the pay phones
We were never seen again


---

Q: OK. What do you think of the MP3 revolution?

A: Ah, revolution, wow. It’s great to hear the word “revolution” again. It’s great that a song now costs exactly the same as a pack of gum and lasts exactly the same amount of time before it loses its flavor and you have to spend another buck. That era which finally ended whenever, yesterday - you know, that era when we pretend rock was the scourge of conformity and consumerism, instead of its anointed handmaid - that era was really irritating to me. I think it’s good for the honesty of rock and roll and good for the country in general that we can finally see Bob Dylan and Iggy Pop for what they really were: as manufacturers of wintergreen Chiclets.

---

Oh the clairvoyance of the dick: it could see the future in a heartbeat, leaving the brain to play catch-up and find the necessary route from occluded present to preordained outcome.
---

And so he stopped looking at her eyes and started looking into them, returning their look before it was too late, before this connection between life and what came after life was lost, and let her see all the vileness inside him, all the hatreds of two thousand solitary nights, while the two of them were still in touch with the void in which the sum everything they’d ever said or done, every pain they’d inflicted, every joy they’d shared, would weigh less than the smallest feather on the wind.
“It’s me,” she said. “Just me.”
“I know,” he said, and kissed her.

-----------------------------
새알밭 (김상현): 10년간 <시사저널> <주간동아>에서 정보통신 전문 기자로 일하다 2001년 캐나다로 이민했다. 현재 앨버타 주정부 산하 교육부에서 정보 프라이버시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인터넷의 거품을 걷어라》, 옮긴 책으로 《청소부 아버지 & 앵커맨 아들》, 《디지털 휴머니즘》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