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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로드 - 유라시아의 가장 북쪽길
윤성학 지음 / K북스 / 2021년 6월
평점 :
품절
평범한 한국인들에게 시베리아는 주로 지도에서만 접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학창 시절의 어렴풋한 기억을 소환해보아도, 나선정벌이나 연해주의 독립운동까지가 한계일 것이고, 그게 정확히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일어난 일이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시베리아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좋은 개설서가 이번에 출판된 '모피로드'라는 책이다. 작가의 말대로 '모피로드'라는 제목은 시베리아의 러시아의 진출을 중심으로 다루겠다는 의미이고, 현재 시베리아가 러시아에 속해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개설서로서는 좋은 접근방향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작가는 역사학이나 지리학이 아니라 노어노문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역시 개설서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을 시대의 특징을 고려해서 대략적으로나마 세부분으로 나눈다면, 탐험의 시대, 제국주의 시대, 현대로 나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탐험의 시대는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모피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17세기의 소빙하기 절정부터 시작된다. 기후가 역사에 미치는 영향은 최근 널리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한반도에는 경신대기근이라는 비극을 불러온 소빙하기가 러시아에는 대외진출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이 시기는 탐험가 개개인이 중요한 시대로 시베리아의 동토에서 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투쟁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인종적으로는 원주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한국인들 입장에서 탐험가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지는 다소 애매하지만, 기존 사회에서 기회를 잡기 어려운 사람들이 가혹한 환경의 신천지에서 투쟁하는 모습들은 충분히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 시기에 일어난 '역사적'인 중요사건은 러시아와 청의 충돌이다. 명확한 국경이 없는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의 탐험은 청의 간접지배영역을 침범했고, 이 지역에 충분한 군사력을 투입할 수 없던 청은 조선에 병력의 차출을 요구하여 나선정벌이 이루어졌다. 국제적인 분쟁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파견한 병력규모가 수백명에 불과한 이유도 이 분쟁이 제국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본격적인 영토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청과 준가르와의 전쟁이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을 도왔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소빙하기가 끝나 모피의 중요성이 떨어지고 탐험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 알래스카의 매각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책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직후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간다. 탐험가가 관리하던 알래스카를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군부에 맡긴 결정이 결과적으로는 알래스카의 매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제국주의 시대는 그래도 한국인에게 친숙한데, 러시아의 입장에서 아편전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청나라를 압박하는 과정과 공산주의 혁명으로 독립군과 관계를 맺게 된 체코 군단이나 소련 건국후 스탈린이 일본과의 내통을 걱정해서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역사는 충분히 새롭게 느껴졌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모피로드의 '부활' 가능성을 논하면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한반도의 철도와 연결시키는 것과 북극항로를 활성화시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나 지구온난화가 북극해의 교통에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설득력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전술한 대로 개설서로서는 충분히 좋은 책이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다. 가장 아쉬운 것은 지도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생소한 시베리아를 다룬다는 특징을 생각하면 적절한 지도가 적절한 곳에 충분히 삽입되어야 이해가 쉬웠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컸다. 그렇게 거슬리는 것은 아니지만, 비문이 제법 있다는 것도 역시 아쉬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