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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ㅣ 을유사상고전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평점 :
불교 설화에 의하면, 나중에 부처가 될 고타마 싯다르타는 룸비니 동산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후, 한쪽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이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내가 홀로 가장 존귀하다. 세상이 모두 고통에 휩싸여 있으니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고타마 싯다르타의 부처로서 저 일갈은 자신만이 세상에서 제일 존귀하며, 자신이 세상의 고통을 해결할 유일한 메시아라는 오만한 일갈이 아니다. 오히려 저 말은 자신과 동일한 생명체 모두가 존귀하며, 그들은 자신의 본성이 부처라는 사실을 모르고 분별심과 집착과 욕심에 휩싸여 고통받고 있지만 부처로서의 본성을 깨달으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라고 봄이 옳다.
쇼펜하우어와 그의 철학 이야기를 하면서 싯다르타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게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달리 명백하게 무신론적이며, 세계는 절대자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자연법칙에 의해 발생했는데, 이러한 자연법칙은 스스로 세상을 퍼뜨리고 거두어들이기에 그 자체가 무無에 기반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 용어를 빌리자면, 세상을 주재하는 이치는 공空 이다.
그렇기에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세상을 인식하는데 있어 칸트식의 선험성은 분명 위대한 철학적 발견이지만, 그 선험적 인식 이전에 본질적인 깨달음 혹은 인식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해 혹은 그 선험적 인식이 기인하는 근본 원인이 어디 있는지에 대해 칸트 철학은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한다. 이에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세계는 곧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신체에 기반한 의지로 인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의 가장 본질적인 의지는 '생生에의 의지'인데, 이 의지는 인간의 존재를 가능케 만들어주는 동시에 인간이 갖는 모든 고통의 근원이 되기에 이를 초탈하는 열반涅槃의 경지에서만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6월 한 달 동안 이 책을 완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과연 내가 이 책을 완독하고 내용을 내것으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활자만 읽은 것에 불과한지 모르겠다.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쇼펜하우어 본인이 자신의 저작은 두 번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만, 그것도 대충 읽은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책을 읽은 느낌을 굳이 기록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책을 완독했다는 의지를 완성하고 거기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