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현영강 지음 / 부크크(bookk)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를 하나 고르라면 아마도 '사랑'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단어를 고르라고 해도 역시 '사랑'을 고르는 경우가 꽤 많을 것이다. 조금 생각을 달리해 세상에서 가장 아픈 단어를 골라보라고 했을 때에도 '사랑'이 답이 될 수 있다. 그만큼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 폭넓은 개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된다. 신이나 부모의 무조건 적인 '아가페'적 사랑도 있고, 남녀 간의 뜨거운 '에로스'적 사랑도 있다. 육체적이고 성적인 것에 치중한 사랑도 있을 수 있고,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친구와의 우정이나 동료와의 끈끈한 동료애도 일종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전 인류를 사랑하는 박애 정신도 큰 의미에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은 어떨까?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일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딸은 어머니를 사랑해야만 하는 걸까? 너무 사랑한 나머지 삐뚤어진 형태를 띤 사랑을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소설 <식물인간>은 이런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가득 담고 있는 미스터리 스릴러 물이다.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이 소설 <식물인간>은 '기성'이라는 이름의 한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인생에 도무지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생각을 장리하고자 무작정 바다가 있는 부산행 열차에 오른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가현이 등장한다. 첫 만남부터 미묘한 스파크가 튀는 두 사람은 어느새 기묘한 여행의 동반자가 되게 된다. 거대한 비밀을 지닌 가문의 딸인 '가현'과 마치 그의 보디가드와도 같은 기성이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끝을 향해 함께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수도 있는 진실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진실의 중심에 다가서면서 그들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장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두 사람이 비밀에 다가서는 것을 막아선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가현의 아버지이자 이 모든 폭력의 정점에 서 있는 '남현'이 있다. 남현과 그 주변에서 그를 지키는 사람들, 그리고 남현과 가현이 살아가는 대저택에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다. 저택의 집사이자 가현의 든든한 지지자인 집사 '연희', 그리고 '연희'의 뒤를 이어 남현의 총애를 받는 집사가 된 '시안', 저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막내 하녀와 노인의 도박



"너는 남 회장이 아주 좋아하는 유형의 인간상이야. 이건 그냥 내가 말해 주고파서 하는 말이고···"

노인이 세상 곤란하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그래, 내가 무엇이야 하는 게 자네의 물음이었나? 참나, 거기에 들어갈 답변의 가짓수가 몇 가지나 될는지."

그리고 노인은 이어 말했다.

"똑같이 답해 주지. 자네가 했던 것처럼."

시안은 흡족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요."

"그러니까···, 일단 나의 직책은 액자의 제작 및 분해야. 그리고 지위는 굳이 따지자면, 그것의 관리인 정도겠지"

<식물인간> 중에서


이 소설 <식물인간>에는 버섯, 궁, 액자, 등대와 같이 상징적이고 모호한 개념들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더욱 미스터리하고 신비하게 만든다. 꽤 많은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가는데,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큰 주제는 '사랑'이라고 생각된다. 소설 속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성과 가현의 사랑과 같은 가장 친숙한 느낌의 남녀 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해서, 연희와 가현의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우정과 같은 사랑, 그리고 등대지기 부부와 마홈의 관계와 같은 가족 간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사랑의 형태들이 하나같이 평범하거나 정상적이라고 보기 힘든 것이라는 점이다. 가현의 경우에는 마치 수집하는 듯한 사랑의 모습이고, 자신의 아들 공덕을 남 회장에게 팔아버린 노인도 정상적인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아내를 향한 남 회장의 사랑의 형태는 소름 끼칠 정도로 기괴하다. 비뚤어지다 못해 일그러진 사랑이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운 파괴적인 사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 남 회장의 사랑이 왠지 오늘날 극도로 이기적인 개인이 되어가는 세상을 반영하고 있는 거 같아 씁쓸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숨소리. 그리고 틈틈이 그와 섞여 나오는 기계음. 병원의 병실에서 들릴 법한 소리였다. 그러한 소리 사이로 남현의 왼손이 커튼 위로 슬금슬금 올라갔다. 벚꽃색의 커튼이 그의 왼손과 함께 단번에 옆으로 걷히었다. 남현은 걷어 낸 커튼에서 손을 떼며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보는 이 하나 없었지만, 끓어오르는 울먹임이 방해된다는 듯이 남현은 감정을 최대한 끌어내리며 입을 벌렸다. 벌려진 그의 입에서 영 균일지 못한 말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식물인간> 중에서

이 소설 <식물인간>은 스토리의 전개가 아주 빠르고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서 가독성이 굉장히 좋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흡입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야기가 막 달려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다. 책의 분량으로 보자면 400 페이지 가까이가 빽빽하게 텍스트로 차 있는 느낌이라 물리적으로는 결코 얇은 책이 아닌데, 생각보다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읽게 된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신선한 한국형 미스터리 스릴러 물을 원하신다면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