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궁창 찬가 -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은 ‘죄’
김학필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1월
평점 :
우리는 삶이 원하는 대로 풀려가지 못하고, 극복할 수 없는 좌절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졌을 때 인생을 '시궁창' 같다고 비유한다. '시궁창'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사전적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는 '시궁의 바닥, 또는 그 속'이란 뜻이고, 두 번째는 '몹시 더럽거나 썩어 빠진 환경 또는 그런 처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시궁'이라는 것이 '더러운 물이 잘 빠지지 않고 썩어서 질척질척하게 된 도랑.'을 뜻하는 말이니, 첫 번째 뜻이나 두 번째 뜻이나 어떤 느낌인지 단박에 느껴지는 강렬하고 부정적인 느낌의 단어다. 살아가는 것을 시궁창에 비유해야 할 정도면, 그 삶이란 어떤 삶일지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 <시궁창 찬가>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시궁창 같은 삶에 보내는 찬가다. 어떤 삶도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니, 성공적이지 못한 삶이라고 좌절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성공한 삶이라고 오만하게 굴지 말자는 이야기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 <시궁창 찬가>의 배경이 되는 것은 로이스터 대학교 아래로 깊게 패인 한 협곡이다. 그 협곡에는 주인공 '하쿠피루'와 동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아주 풍요롭지는 않을지언정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으면서 나름대로 평화롭고 여류롭게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런 평화로운 협곡 밖의 세상에서 위협이 다가온다. 태풍, 소음, 악취, 한기와 같은 풍파와 위험이 이들의 평화로운 삶을 뒤흔들어 놓는다. 마치 우리의 인생이 여러 가지 외부 요소들로 인해 끊임없이 도전받고, 우리는 그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 <시궁창 찬가>의 세계관은 주인공인 하쿠피루가 속한 미지의 종족, '가르시아의 뜻을 잇는 자들'과 스스로를 '카도쿠라의 뜻을 잇는 자들'이라 부르는 쥐 떼의 전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지, 저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인공의 종족은 쥐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방인>도 이 책에 등장한다. 그런데 그 알베르 카뮈의 또 다른 대표작이 바로 쥐 떼의 습격으로 인한 전염병을 그리고 있는 <페스트>다. 묘하게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느낌도 흥미롭다.
그 이방인들은 '쥐'라는 정식 이름을 지닌 개체··· 혹은 생명체였었더라는··· 지식···까지도 취해낼 수 있었더랬지. 그래 여러 병균들을 품어뒀던 것으로다가··· 자기네들과 살갗을 맞닿아냈던 자들을 치명적인 병환을 앓게 만들어 왔었더라는··· 더러워빠졌었던 족속··· 이었더라는 지식! 또 다른 이들에게 짓밟히고, 걷어차이고, 된통 얻어맞은 끝에 죽거나 잡아먹히는 것이 일상이었더라는··· 나약해 빠졌었던 족속··· 이었더라는 지식!
이런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비하기 위한 예방책이자 해결책으로 책을 찾아 도서관으로 향하는 설정도 재미있다. 그리고 그 도서관 안에서 간절하게 찾아 헤매던 책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책들의 이름이 가히 최고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방인>, <군주론>과 마지막으로 저자의 전작인 <다시는 치즈를 못 먹어도 돼!>인 점도 재미있다. 벌써 3편째 연작으로 소설을 내고 있는 저자의 개그코드이자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세계관이라고 생각된다.
이 소설 <시궁창 찬가>를 읽다가 생각난 유명한 인문고전이 한 권 있는데, 바로 <총 균 쇠>다. 작품 속의 두 종족은 우연히 다른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만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세를 키운 두 집단이 충돌한다는 전개는, 마치 <총 균 쇠>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문명의 태동과 발전에 환경과 우연히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개념과 유사하게도 느껴진다. 우리가 오늘날 이루어 낸 것들이 어쩌면 우리 능력만으로 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결코 성공에 자만해서도 부족함에 좌절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다.
뭐··· 그곳이 그런 곳이었던 덕분에, 우리는 그에 들어섬과 동시에··· 외부에서 창문인가 뭔가 하던 것 너머로 봤었던 그것들이자··· 몸뚱어리에 글자들을 박아뒀던 존재들이었던 그것들과··· 선명하다면 선명한 재회를 이행할 수 있었더랬지. 맞아, 각자의 몸뚱어리들에 '이방인', '군주론', '다시는 치즈를 못 먹어도 돼!' 끝으로 '계통 분류학' 등등의 글자들을 박아두고서, 일렬횡대를 갖춰둔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있었던 듯했던 그것들과의 재회를 말이지.
오늘날 세상은 극도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남과 여, 여와 야, 좌와 우, 노와 사, 부와 빈이 중간이 없이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를 헐뜯고 물어뜯고 있다. 이런 현상은 유독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확산되고 있는 문제다. 상대방의 상황과 의견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주장만 펼치며 점점 멀어진다. 지독한 흑백논리로 나와 다르면 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분열한다. 하지만 이 소설 <시궁창 찬가>는 그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는 것도 '오만'의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의구심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극단적이 되어 버린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그 양극단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그들을 각각 그 자리에 있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가고 다른 자리에 있어야 할 운명이었을까? 우리 삶의 어떤 요소들이 그들을 그렇게 다르게 만들었을까? 그들이 이루고 성취한 것은 과연 그들의 힘으로 순수하게 이룬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이 책 <시궁창 찬가>는 수많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의 의사의 생각은 그랬었던 거 같아. 듣고 보니까··· 그는 오만하기만 했던 것을 넘어··· 무려 '무지'했기까지 했었다고 생각···했었던 거 같아. 그래 무지'했음으로써' 잘못된 믿음이나 그릇된 믿음이랄 것을 품어볼 수밖에 없었고, 또 그를 광적으로 신봉했음으로써, 이 사달이 났다면 났던 것··· 이었다고 생각··· 했었던 거 같아. 앞서 언급했듯이 보이는 대로'만' 믿게 했을 만큼 중증의 오만을 앓고 있었던 덕분에, 상황을 보이는 대로밖에 해석할 수 없었던 것도 모자라···.
저자가 이 책 <시궁창 찬가>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한 여러 가지 메시지가 있었겠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감사'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성공도 실패도 모두 나 혼자 이끌어 낸 결과가 아니라면,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타당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오만하지 말고 감사하자. 이렇게 저자의 소설은 문학의 '열린 결말'처럼 '열린 해석'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