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무 - 각본
이지하 지음 / 프로젝트이오공일 / 2022년 5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엔 어디선가 있을 법한 이야기들이 있다. 유행가의 가사를 들으면 듣는 사람마다 전부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아마도 많은 공감대가 있는 이야기라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들으면 내 이야기 같거나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은 낯익은 이야기. 이 책 <그 나무>는 대한민국 어디선가 실제로 일어났을 법한,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가는 책이다.


대학, 대학원

참 독특한 이야기다. 형식은 연극의 희곡 형태로 쓰여 있는데, 스토리도 어떤 연극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 중 실제 저자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나오고, 에필로그에 보면 실제로 저자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실제 저자의 이야기 같으면서도 여러 가지 장치로 모호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나의 이야기 일 수도 있고, 너의 이야기 일 수도 있으며 내가 아는 누군가가 겪고 있는 이야기 일 수도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대학원이다. 오묘한 모양을 한 '그 나무'가 있는 어떤 대학교의 대학원. 대학원에서는 교수가 있고 강사가 있고 대학원생이 있다. 근래 대학원생과 관련된 비하 유머나 개그가 인터넷에 유행했다. 대부분 고된 대학원생의 생활과 과중한 업무(?), 교수님들로부터 당하는 여러 가지 착취에 대한 내용이다. 아마도 폐쇄적인 대학원 사회의 구조와 교수와 제자 간의 강압적인 위계질서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로 더 깊은 학문을 쌓고자 대학원에 진학한 인재들이 여러 형태의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며 이런 짤들이 생성된 게 아닌가 싶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대학원생은 학생의 신분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의 위치에 있다. 대학원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 전공 분야를 살려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방향성을 잡은 것이고, 지도 교수는 당연히 그 분야, 업계의 영향력 있는 권위자일 가능성이 높다. 높은 확률로 갑을 관계가 형상되는 것이다. 교수와 문제가 생기면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해당 업계에서 또 다른 형태의 불이익을 당하게 될 각오를 해야 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정도는 참자'라고 넘어가는 경우가 꽤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그 부분을 짚고자 하는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익숙해지면 안된다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면 안 된 다고 말이다. 작은 도발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점점 수위를 높여 선을 넘어온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서는 안된다.

또 아무렇지도 않게 심부름을 시켰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잡담을 나누고.

그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저도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구나 하고 넘어갔어요.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됐었는데.

그냥 웃어넘기면 안 됐었는데.

<그 나무> 중에서



이야기 속의 '아라'는 시간이 지나 대학원 시절의 어떤 사건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정신적 문제를 않고 살아가게 된다. 평범했던 한 학생의 인생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 누군가에 의해 망가져가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내가 여자만 아니었더라면'이라는 가학적인 자책까지 하게 된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단지 자신의 성별 때문에 불가항력의 일을 겪는다면,

경중을 떠나 누구라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미워하게 될 거예요.

내가 여성만 아니었어도, 내가 남성만 아니었어도...

저는 끊임없이 자학에 가깝게 자책을 했어요.

<그 나무> 중에서

불쾌함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그 나무'는 어떤 특이한 모양을 한 나무다. 보았을 때 불쾌함을 주는 모양의 나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키득대며 장난으로 넘기는 모양의 '그 나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의 존재를 알고 그 나무가 어떤 모양인지 마음속으로 인지하고 있지만, 선뜻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불쾌함에 대항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더 큰 불쾌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만든다. 작은 불의에 대항하지 않으면 더 큰 불의가 당연하다는 듯이 다가오게 될 것이다. 이 책 <그 나무>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냥 '별거 아니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되는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 시작하면 세상은 더 곪아가고 상처는 더 아파질 것이다.

이 나무가 '아무렇지 않음'을 뭉쳐둔 것만 같았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이 드나드는 산책로인데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거든요

심지어 저마저도 신경 안 쓰는 척을 했죠.

나처럼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구나

<그 나무> 중에서


<그 나무>는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거 같기도 하고,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또 <그것이 알고 싶다>같은 고발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안타깝게도 읽으면서 몰입이 되었던 것은 지금도 어디선가 충분히 벌어질 법한 일이라는 사실이 가장 씁쓸한 포인트다. 그럴 수 있다고 치부해 버리면 진짜 그래도 되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이의를 제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묘한 형식의 구성으로 우리 사회의 안타까운 부분을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는 책이었다. 책이 그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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