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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머무는 밤
현동경 지음 / 상상출판 / 2018년 1월
평점 :
얼마전 가족들과 속초로 여행을 다녀왔었다. 둘째가 태어난 뒤로 처음 갔던 여행이었는데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가는 여행이니 떠나기 전부터 힘들 것이란 예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 여행은 나의 예상 수치를 몇배나 뛰어넘는 힘듦의 연속이었다. 오랜 차량 탑승으로 지치고 추운 날씨에 짜증내는 아이들을 달래며 속초의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 볼 여유는 극히 짧았고 맛있는 음식들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음미할 시간따윈 없었다. 일정을 끝내고 숙소로 간 우리 부부는 2017년의 마지막 날이라는 의미를 되새기며 시간을 보낼새도 없이 곯아 떨어지고 말았으니 이쯤되면 내게 여행이란 극기훈련의 체력을 요하는 고된 노동이라해도 과언은 아닐듯 싶다.
나의 상황은 이렇듯 내가 원하는대로 여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없으며 여행 후 온 가족이 병이나는 큰 후유증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여행을 언제나 꿈꾸게 된다. 여행으로 나를 찾겠다는 거창한 목표까진 없더라도 그냥 익숙한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설레임을 느끼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당장 모든걸 멈추고 떠나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렇게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역시 짧은 1박2일의 여행에도 아이들 컨디션 신경쓰고 스케쥴 맞추고 기저귀에 간식에 챙겨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기에 배낭 하나, 캐리어 하나 훌렁 챙겨 홀연히 떠나는 여행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쏟아져 나오는 여행에세이는 대리만족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자괴감을 들게 하기도 하기에 책을 읽으며 살짝 겁이 나기도 한다. 과연 이번 나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줄까.
아침이 오는 소리부터 밤이 저무는 냄새, 살갗을 간지럽히는 봄바람부터 혀끝에 내려앉는 한 송이의 눈까지. 당연하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여기기에 놓치는 수많은 행복들.
여행의 목적이야 수만가지가 있겠지만 이 책속의 이야기는 그저 사람을 위한 여행, 그 여행속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속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글로 쓴 순간들의 기록이다. 사실 여행에세이라는 분류를 하지 않았다면 어찌보면 시집 같기도, 어찌보면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일기 같기도 한 다양한 형태의 글들이 혼재하는 책인지라 그저 여행했던 나라들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 나라에 대한 느낌을 쓴 것이 아니기에 훨씬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나라들을 오가며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깊은 시간 생각하고 되뇌이며 써 내려가는 글들은 오글거리거나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들이 아닌 굉장히 직설적이기도 하고 또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기에 훨씬 더 큰 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미화하고 찬양하며 지금 당장 떠나서 나처럼 새로운 세계를 접하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그냥 한 개인이 여행하며 느낀 것들을 써내려 가고 그렇게 수없이 많은 곳으로 떠나게 하는 그 이유가 그저 사람이 좋아서라는 저자의 이야기에서 풍기는 소박함은 여행이 가지는 새로운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예상컨대 돌아올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점차 사회가 만든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쳐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어쩌면 여행 후에 달라진 것이 없다며 홀로 괴로워하는 것 역시 ‘현실’이 내뱉는 추궁에 지나온 시간들을 합리화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함에서 오는 두려움 아닐까.
사실 대부분의 여행에세이나 여행기를 읽고 나면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지금의 힘든 현실을 마주하곤 하기에 씁쓸하기도 하고, 또 떠나고자 하는 결심에 뒤따르는 수많은 핑계거리들을 덧붙히며 손사래치게 만들기에 우울해지기도 한다. 특히 아이들과의 너무나 힘든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돌아오며 한동안 여행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다시 떠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저 떠나고 싶게 만들기 보단 앞으로의 여행에서 그저 관광하고 맛있는 현지 음식을 먹는데 열중하는 것 이상으로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함께 여행하며 마주하게 되는 사람, 하나의 풍경, 스쳐지나가는 생각등 복합적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함께 경험하고 느껴볼 수 있는 여행을 해야 겠다는 새로운 방식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는 괴로움보다는 비록 언제 다시 가게 될지 기약은 없지만 다음 여행에서 새롭게 찾을 수 있을 많은 것들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오늘도 설렘과 두려움, 사랑과 여행이 한데 섞여 인생을 살아가고 있겠지. 나는 내 방식대로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다만 문득 궁금한 것은 나는 그리고 당신은 무엇에 설레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