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 서른셋
하유지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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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내 나이를 잊어버릴 때가 많다. 굳이 나이에 신경 쓰며 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이 앞자리가 3이 되고 또 엄마가 되고 나서는 나이가 가지는 의미나 감흥이 예전만큼 크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 나이라고 해서 꼭 이런 외모, 꼭 그런 위치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살고자 마음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 이 나이까지 아직 결혼하지 않고 혼자였다면 이런 생각을 갖진 못했을 것 같다. 자의든 타의든 한살 한살 먹어가는 나이에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똑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갈지는 각자에게 달린 일이다. 어떤 삶을 살아갈지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천차만별의 삶, 그 속에서 나와 별다를 것 없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찾게 되는 작은 공통점이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서른을 훌쩍 넘어버린 수많은 우리에게 영오의 삶이 너무나도 찰싹 달라붙어 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후의 몸무게는 33킬로그램.

영오는 3시 3분이나 3시 33분에 시계를 보게 되면 기분이 가라앉았다.

33번 버스가 싫었고 텔레비전에서 33번 채널을 삭제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싫다.

잊지 못했나 보다.


 

작은 출판사에서 국어 편집자로 일하는 영오는 사년 전 엄마를 떠나보내고 서먹해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며 아버지가 남긴 월세 보증금과 밥솥,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첩을 유품으로 받게 된다. 그 수첩에 적힌 것은 들어본 적 없는 세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 첫번째로 써진 홍강주는 아버지가 경비원으로 일하던 중학교의 수학교사다. 소개팅 아닌 소개팅을 시작으로 연애는 사치라 여기던 영오의 삶에 서서히 강주가 자리잡게 되고, 둘은 수첩에 써진 나머지 두 사람을 함께 찾아 나선다. 한편 영오가 만든 문제집을 풀다 문제가 재밌다는 이유로 전화를 걸기 시작해 이젠 매일 연락을 하는 중학생 미지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으로 엄마에게 쫓겨나 그간 방치해둔 개나리 아파트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괴팍한 옆집 할아버지 두출과 버찌라는 고양이를 통해 가까워지고 눈치 빠르고 계산 빠른 미지는 할아버지의 심부름을 해주며 우정을 쌓게 된다.

서른셋인 오영오와 열일곱 공미지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친구처럼 지내지만 특이한 것은 언제나 전화로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한번도 본 적 없는데다 나이차이까지 어찌보면 우정이라는 것이 생길 수 없을 것 같은 두사람이지만 다른듯 닮은 서로에게 끌릴 수 밖에 없었다 보다. 둘 다 스스로를 가두며 세상 밖으로 나가기가 두려웠기에 그들에겐 억지로라도 이끌어내 줄 무언가가 필요했던 상황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어가는 영오와 초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준 할아버지와의 우정을 쌓아가는 미지. 서툴고 힘들었던 둘에게 혼자서는 채울 수 없었을 삶의 반쪽을 채워준 사람들 덕분에 닫혀있던 마음을 서서히 풀어날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달 동안 영오의 인생에 새겨진 이 이름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털어놓아야 할까.

홍강주부터 명보라까지? 아니면 영오부터 공미지까지?

이 다섯 사람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동그라미.

이들은 점으로 시작해 선으로 이어졌다.

점은 선이 된다. 선은 점을 포함한다.


 

이번 생은 누구나 다 처음이기에 서툴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있지만 그로인해 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그저 머물고 스스로를 가둬버리는 사람도 많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 벽을 쌓고 또 쌓으며 점점 두꺼워져 가는 그 벽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너무나 두껍고 버거웠던 그 벽이 작은 노크 한번으로 조금씩 실금이 가고 어느 순간 눈 녹듯 녹아버려 빠져나올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진 누군가가 나를 끄집어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줄 수도 있다. 영오는 그렇게 살아생전 원망했던 아버지를 통해 그런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고 미지는 전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던 두출 할아버지를 통해 죄책감과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 줄 존재가 다가온다면 얼마든지 풀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읽다보면 뻔하기도 하고 예상 가능한 전개에 지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적절하게 재밌고 유쾌한 요소들이 많고 또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관계된 배경과 소재이기에 맞장구치며 피식 웃다가 어느 순간 공감과 감동이 밀려오게 만드는 ‘생계밀착형 감동 소설’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전혀 상관도 없고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서서히 연결되며 다시 이어지는 과정, 그리고 완벽한 사람은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며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그 모습에서 나또한 겪었던 혼란과 아픔들이 생각났고 나를 일으켜 세웠던 존재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한살 한살 나이를 먹으며 점점 벽을 치고 혼자의 세계에 갇혀 허우적대고 있을 모든 아픈 영혼들에게 어딘가에는 분명 나의 0.5인, 날 채워줄 절반이 있다는 것은 아마 큰 위로가 되어 모두에게 새겨지지 않을까 싶다.


 

인생에는 답이 없다.

그 대신 사람들이 있다.

나의 0.5, 내 절반의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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