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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평점 :

부모가 되어보니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이다. 사소하게 했던 말 한마디도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하고 짜증이라도 낸 날엔 후회하며 눈물 흘리게 만드는 너무나 소중한 나의 아이, 나의 가족에게 물리적, 정신적인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사회가 용납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 자신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불운한 어린시절로 인해 망가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너무 가슴 아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이겨내고 견뎌내라고만 하는건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 상처가 얼마나 클지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은 자꾸만 피하게 된다.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도, 감당해 낼 자신도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른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폭력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졌다.
아스트리드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에 가정폭력을 일삼는 가부장적인 남자였다. 어머니는 남편을 ‘보스’라고 불러야 했고, 어린 남매들에게까지 폭력이 가해졌다. 그 중 장남인 빔은 시간이 갈수록 가장 아버지와 비슷해졌고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적 면모를 드러내며 결국 하이네켄 납치 사건의 주범으로 교도소에 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로 납치 사건뿐만 아니라 협박, 갈취, 그리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걸림돌들은 모두 제거해 버리는 살인마가 되었다. 게다가 그 타깃은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동생 소냐의 남편인 코르를 살해하고 그것도 모자라 조카들에게까지 총구를 겨누는 그를 보며, 아스트리드와 소냐는 오빠를 배신하고 그가 모든 죗값을 치르도록 하기 위해 증언하기로 결심한다.
빔은 그 많은 살해를 사주하고도 뻔뻔스럽게 법망을 피해가고 교묘하게 사람들을 부리며 악행을 저지른다. 가장 큰 피해자이자 잠정적 살해대상인 아스트리드는 어린시절엔 아빠로 인해, 커서는 오빠로 인해 언제나 폭력과 억압과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를 나눈 형제인 오빠이고 가족이기에 그녀는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갈등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을 철저히 희생하고 오빠를 돕는 조력자로 살아왔지만 돌아오는 것은 다른 가족들에 대한 끊임없는 갈취와 살해 협박이다. 오빠가 그녀에게 억지로 짊어지게 한 짐을 내려놓기까지 엄청난 아픔과 고통이 뒤따랐지만 목숨을 담보로 결국 오빠를 수감시키고 이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오빠의 죄를 모두 증언하게 된다. 하지만 오빠는 모두가 생각하는 그런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오빠인 빔은 교도소에서 아스트리드의 살해를 지시한다.
오빠가 자신의 가족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깨달았다.
우리의 적은 바깥세상이 아니었다.
오빠가 우리 적이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악마같은 사람이 있을까 싶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모두 그에겐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읽는내내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그저 당하는 아스트리드와 다른 가족들이 답답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그 상황들에 연민이 생기기도 하는 정말 복잡한 감정들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뿌리엔 어린시절의 가정폭력과 학대가 기반이 되어 있고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학습된 것들이 본능처럼 각인되어 한 사람의 인생을, 그리고 한 가족의 삶을 무참히 파괴하게 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빔도 그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그가 저지른 범죄들은 너무 극악무도하다. 끊을 수 없는 존재인 가족이라는 사람이 살인자이고 나조차도 죽이려 하는 사람이라면, 그걸 강하게 극복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마 나였더라도 아스트리드처럼 이용 당하고 고통을 겪어도 쉽사리 놓아버릴 순 없었을 것 같다. 그래서 그녀가 너무나 담담하게 풀어내는 고통의 순간들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직접 겪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속단할 수 없는 그런 일들 속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또다른 사랑하는 가족을 배신하며 자신의 목숨을 거는 그녀를 그 누구도 비난할 순 없을 것 같다. 평생을 살해 위협을 받으며 살아야 할 그녀의 삶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끝까지 멈추지 않을 그녀의 용기있는 이야기들에 큰 응원을 보내주고 싶다.
나는 죽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오빠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