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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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들이 사라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때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은 전혀 쓸모가 없어져 우리의 기억속에서 지워진채 자료로서만 남아있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 있다면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환경이 바뀌어도 본능은 살아남아 다시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에게 본능이란 태어날 때부터 몸 속에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든다. 본능에 충실하자는 말이 나쁘게만 들리지 않는 건 그만큼 우리가 가진 본능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많은 것들이 소멸되어 가도 내게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무엇이 있다는 것에 왠지모를 안도감이 느껴지도 하고..



‘옛날’이라는 게 언제인지, 그때의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그 붉은 방이 냉동 보존된 과거로 둘러싸인 밀실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소설 속 세계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는다. 게다가 결혼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보단 자신과 가장 조건이 맞게 매칭된 상대와 하고 임신은 인공수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성이 초경을 시작하면 의무적으로 산부인과에 가 피임시술을 받아야 하는, 지금 우리 세계와는 너무 다른 모습의 세계다. 게다가 애니메이션 주인공과 같은 허구의 인물과의 연애는 정상이지만 진짜 사람과 연애하는 것은 별종 취급을 받는다. 그 속에서 주인공인 아마네는 어린시절부터 엄마와 아빠는 사랑해서 결혼했고 ‘너는 섹스를 통해 태어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태생부터 남들과 달랐던 아마네는 그래서 당연시 되고 규정되어 있는 것들에 항상 의문을 가지고, 사람과 연애하고 섹스를 하며 정상인 세계에 섞이지 못한채 살아가는데..


정상 속에서 비정상으로 살아가는 고독함은 겪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네는 대다수의 정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반대인 비정상에도 속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비정상이라 규정하는 엄마를 부정하면서도 정상인 사람들처럼 살아가진 못하는 어딘가에 정체되어 부유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언제나 정상이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한 무언가가 항상 필요했다. 그래서 비록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 결혼을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가족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시대에서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가족이 붕괴되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고 철저히 만들어지고 계획된 비정상의 도시에서 소름끼치도록 정상이 되어가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 세상에서도 정상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보여준 세상, 그 바깥에 존재하는 세상, 이 실험도시, 어느 세상에서도 나는 소름 끼치도록 정상이었다. 사실은 비정상이 아닐까 싶을 만큼.


 

 

 

<편의점 인간>,<멀리 갈 수 있는 배>를 읽으며 저자는 항상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다수의 정상들과는 다르고 그곳에 속하지 못하는 외로운 존재이지만 끊임없이 정상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고통을 겪는 존재들이었다. <소멸세계>의 아마네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는 항상 조금 외면당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당연하지 않은 다른 존재들 역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세계와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런 편견속에서 힘들어하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는 그녀의 소설은 어찌보면 기괴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지만 그 속에서 분명한 배려와 따뜻한 위로를 느낄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시 되는 것들이 사라져 버린 <소멸세계>에선 우리 역시 비정상이라 규정될 수 있다.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어왔던 것들도 언제든지 변할 수 있고, 우리 역시 언제나 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가 본능이라 믿어 왔던 결혼과 출산, 가족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어느쪽의 기준에 맞추든 모두에게 부합하는 이상세계는 있을 수 없기에, 언제나 그 중간지점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항상 그 지점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계를 꿈꾸는 저자의 마음이 글 속에 위로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진화의 순간을 살아가는 거야. 언제나 그 길을 가는 ‘도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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