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갈 수 있는 배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윤희 옮김 / 살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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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진 않다. 나역시 많은 것을 강요 받고 억압 받으며 자라왔다. 더욱 무서운건 어느새 그것이 당연시 되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 30대 초반인 나에게도 요즘의 급진적인 변화는 참으로 낯설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고맙기도 하다. 잘못을, 편견과 선입견을 당연시 여기지 않고 바꾸려 노력해주는 사람들 틈에 슬쩍 한발을 담그며 편승해 가는 나 스스로가 부끄러울 때가 많을 뿐. 여성으로서의 틀에 갇히지 않고 ‘나’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여성들은 그래서 아름답다. 비록 시행착오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두려워 주어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괴로운 많은 여성들의 자유가 그래서 소중하다.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많은 여성들에겐 나와 같은 누군가의 고군분투가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기에, 무라타 사야카의 책이 반가울 수 밖에 없다. 



인사를 하고 매장에 들어가 휴게실 안쪽에 있는 작은 일인용 탈의실에서 유니폼을 입고 스타킹을 신는다. 그 행위와 함께 여자라는 성을 자신의 육체에 새겨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그럼 옷 입기 전의 나는 뭐지?’ 문 뒤쪽에 걸려 있는 지문으로 지저분해진 작은 거울에 얼굴을 비추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섹스가 너무나 괴로운 리호는 그래서 자신이 사실은 남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몸은 여성이지만 마음은 남성인, 뭔가 뒤죽박죽인 자신의 성에 대해 정확히 결정내리고 정의내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제2의 2차 성징을 찾아 성공시키려 남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성도 아닌, 남성도 아닌 상태로 어딘가를 돌아다닐 엄두는 나지 않아 집과 조금 떨어진 독서실을 실험의 장소로 삼게 된다. 거기서 우연히 만난, 리호가 일하는 레스토랑의 손님인 츠바키는 한밤중에도 목까지 선크림을 바를만큼 외모에 신경쓰는 그 누구보다 여성이라는 기준에 가장 부합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친구이자 함께 독서실에 다니는 치카코는 자신을 별에 대한 감각이 강한, 인간을 물체로서 느끼는 독특한 우주적 세계관을 가졌다. 그래서 자신은 다른 시간의 흐름속에 있고 그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시간속에 있기 위해 독서실을 다니는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이 시간을 환상처럼 느낀다.


리호는 남자와의 섹스가 너무나 힘들었기에 자신은 남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완벽한 남자가 될 수도, 그렇다고 여성이 될 수도 없었고 단순히 무성욕자이지도 않은 명확하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상태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성별을 벗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여성스러운 츠바키는 리호가 여자로서 느끼는 불편함은 당연한 거라고, 그 고통은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여자라는 사실이 괴로워 남자로 도망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리호는 그 모호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답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호는 성별이 없는 사람처럼 있고 싶었다. 그렇게 있다 보면 자기 안에 있는 남성성이 표출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가식이요 과장일 뿐이었다.



치카코는 자신의 세계와 다른 사람들의 세계는 다르고 연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별이고 우주에 속해있고 아이들의 소꿉놀이처럼 사람들 속에선 각자 정해진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지만 끝남과 동시에 그 환상은 사라지고 결국은 우주에 혼자 남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이세자키라는 남성이 다가오고 치카코 역시 그에게 호감을 가지지만 사귀자는 이세자키에게 우리 사이에 섹스가 성립하는지 먼저 알아보고 결정하자는 답변을 한다. 별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섹스가 가능하다면 자신 역시 별이 아닌 인간의 육체를 가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서서히 마법이 풀리고 아침과 밤이 한낱 태양빛과 우주의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시간은 영원히 우주 속으로 편입된다. 그곳은 고요하고 평온한 세계지만 늘 환상의 여운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떻게 보면 섹슈얼리티는 굉장히 예민하고 불편한 이야기이기에 읽다보면 거부감이나 너무나 낯선 감정을 느끼게 될 수도 있을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역시 한번에 모든 인물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하지만 무라타 사야카의 가장 큰 강점이 예민하고 불편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또 흥미롭게 풀어낸다는 것이다. 전에 읽었던 <편의점 인간> 역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채 평범함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였고, <멀리 가는 배>의 리호와 치카코 역시 평범한 여성, 평범한 인간으로 속하고 싶은 의지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비슷한 듯 하다. 하지만 긴 시간동안 여성이라는 정해진 틀에 맞춰 많은 불편과 고통을 참고 살았던 옛날과 달리, 이젠 그 고통을 참지 않고 드러내고 자신에게 편하고 맞는 것을 찾기 위해 애쓰는 지금의 여성들이라면 훨씬 더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여성이라면 꼭 가야할 길이라고 여겨졌던 길을 걸어왔지만, 이젠 태어날때부터 정해진 성별에 억지로 맞춰가며 힘들게 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리호도, 츠바키도, 치카코도 모두 자신이 정해둔 이분법적인 잣대에 스스로를 맞추려 했기에 힘들고 괴로웠던 것 아닐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혼란을 이 책의 주인공들이 가장 잘 나타내주고 있기에,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좀 더 다양한 성 정체성과 더 넓은 시야를 가질 필요성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함께 방에 있는데도 치카코는 츠바키와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었다. 어느 쪽이 맞다가 아니라 양쪽 모두 올바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것이 조금 힘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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