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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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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면 몇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빈번하게,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것을 말하자면 먹는 순간의 즐거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예전엔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단지 배를 채우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맛집을 찾아 다니거나 집에서 예쁘게 요리해서 먹는다는건 참으로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내가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확실히 내가 어떤 재료와 어떤 맛을 좋아하고 어떻게 조리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맛, 그리고 맛있게 먹어주는 가족들을 보며 음식이 주는 행복감을 조금씩 느껴갔던 것 같다. 음식에는 그 음식을 먹던 순간의 느낌과 기억이 함께 담겨 있어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을 떠올리면 음식이 먼저 떠오르게 될 정도로 이젠 내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의 아름다운 추억이 가미된 음식을 통해 단지 먹기 위해서만이 아닌 다시 한번 그때로 되돌아 가고픈 희망을 나타내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는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음식은 언제든 다시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나에게는 요리하는 것도 하루하루의 즐거움 가운데 중대한 요소다. 다른 집안일은 그저 필요하니까 할 뿐이지만 요리를 하는 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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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소설이 안 써진다”라고 말하는 일본 최고의 미식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인 모리 마리. 그녀는 소위 온실속의 화초처럼 정말 귀하게 사랑받으며 자랐다. 하녀들이 시중을 들어주는 부잣집 공주님이었던 그녀는 특히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릴적 부터 아버지인 모리 오가이는 그녀를 무릎에 앉혀 놓고 “마리는 최고, 마리는 최고, 눈도 최고, 눈썹도 최고, 코도 최고...”라는 말을 해주곤 했다니 엄청난 고슴도치 부모 밑에서 응석받이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행복했던 유년 시절과는 달리 두 번의 결혼 생활은 모두 파국으로 끝났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지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녀의 재능은 뛰어난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솔직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은 생활을 안정적이고 풍족하게 해주지 못했다. 싱크대도 공용으로 써야 하는 작은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고 다른 집안일엔 전혀 소질이 없었지만 유일하게 요리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어서 그녀는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돈이 없어도 돈 드는 짓만 하는 불편하지만 마음만은 귀족이었던 그녀의 식생활은 과연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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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젊었을 때 프랑스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서양 요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글마다 듬뿍 묻어난다. 어린 시절 먹었던 서양식 양배추말이나 가루로 탄 코코아가 아닌 진짜 초콜릿을 녹여 만든 초콜릿, 프랑스에서 먹던 싱싱한 굴, 로스트 비프. 그녀만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맛있는 레스토랑의 요리들과 처음 시댁식구들에게 요리해 호평을 받은 연어와 화이트 소스, 친구인 요코에게 만들어 준 된장 초무침, 달콤한 브레드 버터푸딩과 크로켓 토마토주스조림까지 단순한 방법으로 본격적인 요리의 느낌을 내는 방식으로 너무도 간단하지만 간단하면서도 솜씨가 필요한 요리를 만드는 그녀의 음식은 많은 사람들과 그녀 스스로를 만족시켜 주며 과연 요리에는 일가견이 있다는 평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의 솔직하고 깐깐한 성격은 음식에 관해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햄버그가 맘에 들지 않아 “이게 아냐. 이건 싫어!”라고 씩씩거리며 우걱우걱 햄버그를 입에 밀어 넣고 화난 채 식사를 하고, 오믈렛에 토마토케첩이 뿌려져 나오면 깊은 분노를 느끼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그 모든것의 밑바탕엔 아버지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생각된다. 그녀의 글 대부분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동경을 담고 있고,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음식이나 맛보게 해준 많은 요리들이 그녀의 미식가적인 면모를 더욱 키워주었다. 전쟁으로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모두 잃어버린 것에 대해 끊임없이 안타까워 하고, 아버지가 무릎에 앉혀주고 해주었던 이야기들을 계속 되뇌이는 걸 보면 그녀에게 아버지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알 수 있다. 음식으로 연결된 그녀의 행복했던 유년시절과 암울했던 젊은 시절을 지나 화려하고 풍족하진 않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자신만의 레시피로 요리하고 그것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그녀의 삶을 만날 수 있다.
요리의 맛은 봄이나 여름 등 계절의 변화, 그날그날의 날씨 상태, 선선하거나 덥거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또 먹는 사람의 기분에도 변화가 있으므로 숟가락으로 몇 숟가락, 몇 개, 몇 그램이라는 식으로 융통성 없이 만들 수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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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결혼을 하며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게 되었고, 대부분 레시피에 의존해 만들어야 했기에 만들기에 급급했고 예쁘게 담아내는 것까진 엄두도 못냈었다. 하지만 차차 시간이 흐르며 레시피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요리들이 늘어나고 또 시행착오를 겪으며 나만의 레시피를 만들어 나가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을 땐 요리가 참 재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은 플레이팅에도 많은 중점을 두기도 하며 점점 발전하는 나를 보게 되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기쁨, 그리고 그것을 함께 하는 사람과의 즐거운 기억은 평생을 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모리 마리 역시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아버지를 음식을 통해 추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든 음악이든,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기에 그녀가 음식을 통해 찾아가는 자신만의 삶의 즐거움과 기쁨을 보며 읽는내내 그녀처럼 확고한 취향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자신이 처한 암울한 처지보다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추구하며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음식, 그것도 예전 시대의 음식들이라 사실 낯선 것도 많았고 상상이 되지 않는 것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묘사하는 수많은 음식들은 읽다보면 절로 침이 고이고 그 아름다운 자태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음식을 사랑하는 그녀가 들려주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인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좋아했던 따끈한 홍차 한잔과 달콤한 디저트를 함께 곁들인다면 더욱 풍미있는 독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훌륭한 식도락가다. 넘치게 훌륭해서 훌륭함이 거스름돈을 내줄 정도다. 젊은 사람이면 또 모르겠지만 이미 누가 노인이라 부를 때 아니라 말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먹는 걸 좋아하기로는 여전히 아이 못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