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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1 (미니북)
조지 오웰 지음, 하소연 옮김 / 자화상 / 201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주어진 자유를 당연히 여기곤 한다. 하지만 자유가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다. 특히 요즘의 우린 스스로 결정과 선택을 하는 것조차 어렵게 느낄 때가 많다. 어떨때는 그냥 주어진대로, 누군가 시킨대로 움직일때가 훨씬 편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다. 자유를 그렇게나 갈망하면서도 그 자유가 주어졌을 땐 어찌할바를 모르는, 이중적인 모습에서 지금 우리가 가진 혼란스러운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어린시절 내가 그렸던 미래의 2018년은 날아다니는 자동차에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는 행복한 삶을 꿈꿨지만, 지금이 과연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좋은게 좋은거고 편한게 편한거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점점더 수동적인 사람이 되어갈 수록, 누군가는 우리를 조종하기도, 또 거짓을 진실이라 믿게 만들기도 쉬워지지만 말이다.
윈스턴은 마치 괴물만 사는 세계에서 자신도 방향 감각을 잃고 바다 깊은 숲속을 헤매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혼자였다. 과거는 사멸하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었다. ‘도대체 단 한 명의 인간이라도 살아남아서 내 편에 서줄 것인가? 그리고 당의 지배가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알 수 있단 말인가?’
1903년 6월 25일 인도의 벵골에서 태어난 조지 오웰은 1933년 첫 소설 <파리와 런던 안팎에서>가 출간된 이후, 척박한 노동자의 삶이나 내전의 참상을 토대로 지은 소설을 발표하며 1945년 8월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배신에 바탕을 둔 정치우화 <동물농장>이 출간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46년 스코틀랜드 주라 섬에 머물며 집필한 이 책, <1984>는 그의 최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49년에 출판된 디스토피아 공상과학 소설이자 출판 당시보다 35년 후인 1984년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암울한 미래를 제시한다. 책이 출판되던 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때로 그로인해 이 소설은 반공산주의 혹은 반사회주의 소설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1984년 영국은 오세아니아의 하나의 주로 빅 브라더라는 최상위 지배자가 전체주의 사상을 주입하며 통치하고 있다. 텔레스크린을 통해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되고 당에 반기를 드는 사람을 식별하는 사상경찰이 존재한다. 만약 불온한 사상과 당에 대한 반감을 가진 것이 적발되면 그 사람은 말 그대로 증발된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윈스턴은 기록조작을 담당하고 있다. 빅 브라더를 칭송하고 믿는 열성적인 다른 동지들과는 달리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기억하는 진실과 조작된 과거 사이에서 갈등하고 빅 브라더의 존재와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빅 브라더가 인민의 적이라 지칭하며 증오하게 만드는 존재인 골드스타인과 대규모 비밀 군대이자 국가 전복을 꾀하는 지하 조직 형제단에 끌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은 철저히 당원들을 지배한다. 조작하고 위조된 거짓말은 역사가 되고 진실이 된다. 개인의 성욕마저 억누르기 위해 쾌락을 제거하기도 한다. 어린시절부터 간접적인 방식으로 교묘하게 사상을 주입한다. 하지만 아무리 진실을 왜곡한다고 해도 그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전혀 느끼지 못할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중 사고를 통해 사람들에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이중사고란 두가지 상반되는 생각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속이고 있는 행위 역시 함께 인식하기에 모순된 것들을 포장하며 스스로를 통제하게 된다. 당은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전쟁 상태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을 통해 사회체제를 유지하고 공공의 적에 대한 증오와 철저히 억압된 본능을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폭발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도 들어주지 않은 진실을 중얼거리는 고독한 유령이다. 그렇지만 약간 애매모호하게 중얼거리기만 하면 이런 상태가 중단되지 않고 지속될 것이다. 진실을 들려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엇보다 건전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1984> 속의 사람들은 텔레스크린을 통해 모든 것을 감시당한다. 1984년에 그런 기술이 있을 수 있었을까란 생각은 뒤로하고 30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딜가나 cctv가 설치되어 있고 우리의 개인정보는 기록되고 저장되며 언제든지 추적할 수 있다. 빅 브라더 같은 존재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탄핵 사태를 보면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뒤에서 조종하는 강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마주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면에서 소설의 배경이 1984년이고 이 책이 실제로 쓰인 것이 1949년이란 것을 생각하면 감탄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그렇게 감시당하던 사람들은 의심을 받는 순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증발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람이 왜 사라졌는지 신경쓰지 않는다. 그 사람의 과거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진다. 우리나라의 그즈음을 생각하면 그와 다르지 않다. 국가의 이념에 위배되는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죽음을 당하곤 했지만 그 죽음은 철저히 위장되어졌으니 말이다. 게다가 소설속에선 영어로 대변되는 구어가 아닌 신어를 계속적으로 만들며 구어를 삭제해 나간다. 여기서 언어가 대중들에게 가지는 힘을 깨달을 수 있다. 일제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우리에게 자행한 민족말살정책을 생각해보면 역사와 언어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었던 일본의 만행을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어쨋든 엄청난 시간의 갭을 넘어서 지금 우리 시대에도 충분히 대입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곳곳에 담겨 있고 치밀하고 입체적인 인물 묘사에 푹 빠져 격렬하게 감정 이입을 하며 읽어나갔던 것 같다. 비록 윈스턴은 계속 저항하지만, 결국 마지막은 그가 꿈꾸던 미래를 맞이하진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저 시대에 살았다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나처럼 나약한 정신으론 분명 체제에 순응하며 아무런 의심 없이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윈스턴을 비난하지도, 극악한 당의 지배세력을 증오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런 암울한 시대에 살지 않는 것에 안도하고 위안을 받을 수 밖에.. 하지만 내가 사는 이 시대라고 크게 다를까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국민을 개돼지라 지칭하는 지배세력이 분명히 지금도 존재하고,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사실을 조작하는 일 역시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암울한 <1984> 속 디스토피아가 2018년 지금 우리의 시대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그것을 써낸 조지 오웰의 통찰력에 놀라게 되고, 또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소름끼치고 무섭게 다가오기도 하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란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유가 허용된다면 다른 것들은 모두 자연히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