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을 할 땐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인생의 중심은 사랑이고, 나의 시간과 공간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 사랑이 언젠가 끝날 것이란 생각은 단 1초도 하지 않는다. 영원히 지속되고 영원히 이 사랑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란 편협한 시각에 갇혀 눈도 귀도 모두 실제와는 다른 것을 보고 듣는다. 하지만 그런 사랑이 끝나게 되면? 그때는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며 조금씩 그때의 기억과는 다른 기억으로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이 끝나고 그 사람은 떠났어도, 어떤 형태로든 그것은 기억으로 남아 하나의 이야기로 존재하며 내 삶의 일부를 차지하게 된다. 



나는 열아홉이었고, 나는 사랑은 썩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과 퇴색에 내력이 있다고 믿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2011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영국의 대표 작가인 줄리언 반스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현대 언어를 공부했고, 1969년부터 3년간 <옥스퍼드 영어 사전> 증보판을 편찬했다. 이후 유수의 문학 잡지에서 문학 편집자로 일했고 TV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첫 등단부터 서머싯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시작했고 그 뒤로도 수많은 상과 훈장을 받은, 어느새 70세가 넘은 노장이다. 사실 맨부커상 수상작들을 읽어보면 그닥 재미있다거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지 않다. 분명 상을 수상했으니 훌륭한 작품이란 뜻인데 도무지 읽어도 큰 감흥과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내가 읽었던 여타의 수상작들과는 달리 읽자마자 그의 팬이 되게 만들었다. 단지 작품성이 있는 것만이 아닌 더불어 흥미롭고 재밌는 소설. 그의 소설이 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인 폴은 열아홉살이 되던해 집근처 테니스 클럽에서 만난 자신감 넘치고 위트 있는 수전 매클라우드 반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폴보다 나이가 두배는 많은, 자신 또래의 두 딸이 있는 유부녀다. 그럼에도 수전에게 급속도로 빠지게 된 폴과 그런 그에게 역시 깊게 빠지게 되는 수전이 남편에게 수시로 폭행을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 폴은 수전이 모아둔 자금으로 런던으로 떠나게 된다. 둘 만의 공간에서 행복만이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서서히 문제가 생긴다. 수전이 우울증과 알콜중독에 빠지며 폴은 점점 그녀를 감당하기 힘들어 진다. 둘이 함께 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지는 상황에서, 사랑의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던 폴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다, 우리 둘이, 그리고 우리가 이르러야만 하는 곳이 있다, 다른 것은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해서 결국 내가 꿈꾸던 곳에 가까운 어딘가에 실제로 이르렀지만, 나는 대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연애가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간 함께했던 시간들을 쭉 돌아보게 될 때도 있다. 굳이 그렇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내 인생에서 회자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연애고 사랑이니까. 게다가 첫사랑의 강렬한 기억은 평생 잊을 수 없다. 특히나 폴의 첫사랑은 너무나 강렬했고, 그 사랑이 끝난 뒤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과정들속에서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이 끝난 뒤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지만 수전이 알콜중독에 빠지고, 그것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만큼 나빠졌을 때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 수없이 다짐했던 폴이지만 결국 그녀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듯 사랑이란 그 순간의 감정, 어쩌면 마약과도 같이 취하고 깊이 중독되어 버리는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면 그 사랑도 서서히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결국 끝나버리고 과거가 되었을 때, 우리의 기억은 그때와는 다른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시키게 된다. 그렇게 모두에겐 자신만의 이야기가 생기게 되고, 결국 그 이야기만 마음속에 남아 평생동안 내 삶 속에 머물며 곱씹어 보게 된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사랑에 대한 폴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사랑이 주는 행복과 고통, 기쁨과 슬픔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아마 줄리언 반스가 평생에 걸쳐 고민하고 이해하고자 했던 사랑에 대한 것들을 70이 넘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이 책속에 모두 담고자 했던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행복했던 사랑의 시작부터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되는 사랑의 끝까지,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겪었음에도 사랑을 부정하고 후회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다시 써내려가며 그 이야기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이 결국 우리들이 사랑을 하는 방법, 그럼에도 사랑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내 의견으로는, 모든 사랑은, 행복하든 불행하든, 일단 거기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게 되면 진짜 재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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