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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평점 :
아이의 시각과 어른의 시각은 다르다. 단지 보이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는 어린시절과는 달리 어른이 되면 눈에 보이는 것일지라도 믿지 않고 의심하고 다른 이면을 생각하게 된다. 어린시절 읽었던 지루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고전들이 어른이 되어 읽었을 땐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상황, 같은 사건일지라도 아이가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어른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래서 어린시절엔 언제나 호기심으로 가득하고 어른들의 비밀을 하나씩 알아내며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복합적으로 얽히고 설킨 어른들의 세계가 어린시절엔 참으로 궁금하고 흥미로웠지만, 어른이 되고보니 참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란걸 어른이 되고서야 느끼게 된다. 어린시절 한낱 재미로 했던 장난과 행동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미처 예상하지 못한채 어른이 되어 감당할 수 없을 일들이 되어 돌아온다면 더더욱..
살다보면 고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쓰고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규정한다.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초크맨>은 원고 공개 2주 만에 26개국에 판권이 계약되며 에이전시 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판매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의 최대 화제작으로 떠오르며 총 39개국에 계약된 대단한 저력의 책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초크맨>이 저자인 C.J.튜더의 데뷔작이란 것이다. 데뷔작부터 말그대로 초히트를 친 저자는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며 단편소설을 써서 게재해 오다 딸이 생일선물로 받은 분필로 차고에 그려둔 일련의 그림들을 보며 영감을 얻어 <초크맨>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섬뜩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숲에서 토막 난 시체가 발견된다. 하지만 머리가 없다. 시체의 머리는 끝내 찾아내지 못한채 이야기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어진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에디가 사는 앤더베리 마을은 참 작다. 건너 건너면 모두가 연결되는 그런 마을이다. 1986년 12살이던 에디에겐 개브,호포,미키,니키라는 패거리 친구들이 있고 다같이 함께 간 축제에서 에디의 눈 앞에서 놀이기구가 고장나며 예쁜 외모에 눈길을 끌던 댄싱퀸이 눈 앞에서 피범벅이 된다. 새로 부임하게 될 핼로런 선생님과 함께 댄싱걸을 구하며 영웅 취급을 받지만 사실 에디는 핼로런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도망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도 서서히 잊혀지기 시작하고 에디와 친구들은 개브의 생일파티에서 의문의 선물로 받은 분필로 서로만의 암호을 정해 기호와 초크맨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초크맨을 그리기 시작한뒤로 사건과 의문의 죽음이 이어진다. 에디는 초크맨 암호에 따라 놀이터에 갔다 미키의 형인 션으로부터 모욕적인 폭력을 당한다. 하지만 션은 강에 빠져 죽게 되고 그곳에도 초크맨은 그려져 있었다. 니키의 아빠인 마틴 목사가 교회에서 의문의 폭행을 당했을 때도 초크맨이 그려져 있었고 댄싱걸 일라이저가 토막난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도 초크맨의 암호를 알고 있는 에디와 친구들이 표시를 따라가 가장 먼저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2016년 현재의 에디는 교사이고 개브와 호포는 아직 앤더베리 마을에 함께 살고 있지만 션의 죽음 이후로 멀어진 미키는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어느날 분필이 든 편지를 모든 친구들이 받게 되고 에디는 떠났던 미키로부터 함께 초크맨의 이야기를 글로 쓸 것을 제안 받는다. 미키는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이야기하고 에디와 헤어지지만 미키 역시 자신의 형처럼 강에 빠져 죽은채 발견된다. 긴 시간이 흘렀어도 자신을 둘러싼 초크맨과 의문의 죽음들이 에디를 계속 괴롭히게 되고 결국 에디는 초크맨이 누군지 알아내고 밝히지 않으면 이 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일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오랫동안 나는 그 사건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어. 피했어. 격리시켰어. 그러다 이제 그 모든 공포와 죄책감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제대로 처리할 때가 됐다는 결론을 내렸어.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교차되며 이어지는 이야기는 스릴러 같은 극적인 긴장감과 함께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며 겪는 인식의 변화와 그를 통해 서서히 이야기가 풀어지는 성장기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많은 등징인물들이 에디의 주변에 있고 어린시절 겪었던 상황과 사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마주했을 때 새로운 이면을 발견하며 의문들이 해소되어 가는 과정이 굉장히 잔인한 묘사와 섬뜩한 표현들로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진다. 사실 스릴러나 추리 소설은 읽다보면 어느정도 누가 범인이겠다 싶은 촉이 발동한다. 하지만 초크맨엔 범인일 것 같은 인물들이 너무나 많다. 의심스러운 특징과 상황들로 나름 범인을 추리하며 읽어나갔지만 난 결국 범인을 맞추지 못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사실은 별 것 아니며 의외로 생각지 못했던 인물과 사소한 상황들이 사건의 중심으로 훅 치고 들어와 반전의 묘미를 주기도 했다. 12살 어린 아이들의 장난에서 시작된 일들이 결국엔 눈덩이처럼 커져버리고 거짓말과 비밀들로 켜켜이 덮혀 살인이라는 감당 못할 상황으로 번진다. 어린시절 그냥 넘겨버리고 지나쳤던 일들이 어른이 된 에디의 눈엔 절대 사소하지 않은 일이었음을 깨달으며 진실에 다가가는 그 과정에서 아이가 느끼는 단순한 공포을 넘어서 더 잔혹한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 초크맨의 비밀은 하나씩 풀어진다. 단순한 살인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닌, 인간이 느끼는 극강의 공포와 섬뜩한 비밀들이 끝까지 긴장감을 주고 자칫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지 모를만한 사건들도 저자만의 예리함과 구성으로 훨씬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어 이야기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보다 단순히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짐작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고, 비록 절대적인 악은 없을지라도 누군가는 선의로, 누군가는 두려움에 저지른 작은 악행들일지라도 결국엔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잔인한 살인사건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뒷덜미의 털이 쭈뼛해질 만큼 공포스럽고 섬뜩한 표현들이 많아 사실 처음엔 밤에 혼자 거실에서 책을 읽다 너무 무서워 그뒤론 사람 많고 밝은 카페에서 오전에 읽어나가게 만든 만큼, 지금 무더위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서늘한 재미를 안겨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모든 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게 한순간에 날아가버릴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그걸 들고 왔는지 모른다. 뭐라도 붙잡고 싶어서. 그걸 안전하게 지키고 싶어서. 아무튼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